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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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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무현과 김대중, 그리고 박주선 - 같지만 다르다.

작성일09-11-09 09:53 조회4,3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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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김대중, 그리고 박주선 - 같지만 다르다.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박주선. 세 사람 간 인연은 물고 물려있다. 때론 협력과 계승의 관계지만, 이면에선 부단한 극복과 단절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느 측면이 우세하냐에 따라 때론 협력을, 때론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박주선의 고난은 잉태됐다.
박주선은 DJ정권 하에서 ‘한 번의 구속과 한 번의 무죄’를 겪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하에서 ‘두 번의 구속과 두 번의 무죄’를 겪었다.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DJ정권 하 그의 수난은 보수 기득권세력의 공세에 의한 희생양이었다. 노무현정권 하 수난은 노무현식 권력 재편과정에서 이뤄졌다. 이는 곧 노정권의 DJ와의 단절과 극복 과정이기도 했다.
DJ는 이제 현실정치에선 과거사다. 그러나 노무현과 박주선은 아직 살아있는 현실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만들어낼 현실정치의 드라마가 더 남아있다는 얘기다.


 󰠙 노무현과 박주선 - 같지만 다르다
 박주선과 노무현.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여러 가지다. 둘 다 법률가 출신이다. 박주선이 사법고시 16기로 노무현의 1년 선배다.
모두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법고시를 통해 입지전적 출세를 이룬 사람들이다. 60, 70년대 가난한 집안 수재들의 전형적인 출세경로다.
가난은 두 사람의 성장과정 뿐만 아니라 성격과 기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가난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와 대응은 전혀 달랐다. 기질과 성향의 차이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노무현은 가난에 울분을 토하고 반항한다. 어렸을 적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공부를 통한 변화를 꿈꾸지 않았다. 그는 부산상고를 간다. 그리고 한판의 도박인 고시를 통해 ‘인생역전’의 길을 닦는다.
반면 박주선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가난은 그에게 하나의 목적에 몰두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그는 자신의 주특기라 할수 있는 공부를 통해 극복의 길을 간다. 집안의 절대적인 지원 은 그가 공부의 길을 갈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정상적인 성장과정인 광주고-서울법대를 거쳐, 고시를 통해 검사의 길을 간다.
두 사람의 자서전을 보면 두 사람의 기질과 성향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수 있다.

<이 땅의 새벽을 위해> 박주선, 2000
“여전히 가슴에 사무치는 그때의 기억을 말로는 다할수 없다. 내가 그런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그리고 미친 듯이 공부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면 저녁을 먹기 위해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곤 했다.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별다른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밥을 지어먹고 책을 보다가 잠이 드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늘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 만큼 공부한다면 여건상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욱이 나를 위해 모든 삶을 희생하는 가족이 있었다.

‘대전법조비리’ 파문 때 과거의 관행적인 떡값이나 전별금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 나왔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때 나와 같이 일을 했던 후배 검사 두 명은 망설이지도 않고 내 이름을 댔다고 한다.
막중한 업무에 고생하는 직원을 위해 전별금을 받는 것은 검찰 내에서는 관행처럼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관행은 관행일 뿐 나는 고집스럽게 거절하곤 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받았다면 부하직원들이나 경비원 그리고 청소부들에게 그 자리에서 나눠주곤 했다.

동기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빠른 진급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열심히 한 일이 있다면 검사로서 최선을 다한 게 전부였다. 나의 검사로서의 좌우명 역시 남달리 빠른 진급에 한몫 하지 않았나 싶었다.
‘피의자 스스로 납득하는 수사, 누구든지 조사 결과에 승복하는 수사.’”

<여보, 나좀 도와줘> 노무현, 2002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정은 좀 달라졌다. 가난 때문이었다. 공부는 잘하고 성격도 명랑한 편인데도,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이 국민학교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다들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다니거나 퍼런 돗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다. 가끔 고무에 헝겊을 댄 가방도 있었는데,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이나 간혹 가지고 다니는 고급 가방이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당번이 되어 친구와 둘이 교실을 지키다가 그렇게 생긴 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둘이서 가방을 뒤적여 보다가 그만 면도칼로 가방을 쭉 찢어버렸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모르겠다. 체육시간이 끝나자 교실은 곧 발칵 뒤집혔다. 담임 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끝내 자백을 않고 버텨 넘어갔다.

1학년을 그럭저럭 보낸 후 2학년이 되면서 난 ‘농땡이’를 치기 시작했다. 머리를 안 깎이려 시험 기간에 도망을 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성적은 중간도 안되는 수준까지 떨어져갔다. 한마디로 고등학교 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선배판사들을 따라 좋은 술 마시러 다니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판사들은 거의 변호사들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다녔다. 나도 거기에 휩쓸려 다니느라 공부도 제대로 안한 것 같다. 선배판사들 중에는 변호사 한두 사람을 가리켜 왕소금이네 짠돌이네 하면서 욕을 하곤 했다. 술을 잘 안 산다는 것이다. 나도 덩달아 그들을 밉게 생각했다. 그 짠돌이 변호사들을 물 먹일 방법은 없을까하는 나쁜 심보를 가지기도 했었다.”

두 사람은 고시에 합격함으로써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박주선의 사시 수석 합격은 당시 큰 뉴스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과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노무현의 고시 합격 역시 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빅 뉴스였다. 가난한 집안의 상고 출신이 독학으로 이룬 개가였기 때문이다.
고시 합격이라는 공통의 성과였지만, 도전에서부터 두 사람의 성향과 기질의 차이가 드러난다.
노무현의 고시 도전은 결단과 모험의 성격이 강하다. 군대를 갔다오고 결혼까지 한 후 고시에 도전한다. 가정을 꾸린 가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건 도박에 가까운 시도였다. 가정의 생계 등에 대한 책임감을 먼저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다.
노무현의 도박에 가까운 결단과 도전은 그의 인생과 정치 행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그는 판사직을 포기한다. 승부사 기질의 그로선 조직이라는 데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후 부산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한때 요트를 타는 등 부자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80년대 시국사건 변호를 계기로 인생의 행로를 재야 인권변호사로 바꾼다. 변화와 반전의 연속이다.
그후 YS를 거친 정치권 입문, 3당 합당 거부로 YS와 결별, 잇따른 부산출마와 낙선 등 결단과 도전의 길을 걷는다. 모두가 건곤일척의 승부수와 그를 통한 반전이 그의 인생기록을 채운다.
그는 2005년 7월 열린우리당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나의 선택은 항상 옳았다”고 주장했다. 성공이 만들어낸 자기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박주선의 고시 도전과 합격은 충분히 예견된 수순이었다. 광주고-서울대 법대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는 검찰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아 그 총수를 꿈꾸며 절제와 능력을 갖춰간다. 조직에 적응하면서, 실력과 능력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간다. 변화와 반전은 없다. 대신 이 과정에서 그는 공직자로서 청렴하고 강직한 모습을 보인다. 가난한 집안 출신들이 빠지기 쉬운 돈의 유혹에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 그에게 가난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자신을 담금질하는 무기로 작용했다.
DJ정권 이전 검찰에서 호남출신의 출세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 요직을 영남출신이 독차지했다. 김태정이 호남출신으로 YS정부에서 총수자리에 올랐지만 지역안배의 성격이 적지않았다.
박주선에 대해 DJ는 항상 “내가 부르지 않았으면 검찰총장이 됐을 텐데”라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청탁과 줄서기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력과 능력으로 ‘호남출신 검찰총장’의 길을 간 것이다.
그가 정치적 격랑에 휩쓸린 것도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었다. 그의 정치인생은 국민의 정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권력의 세계는 실력과 능력만으로 승부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의 변화와 반전은 권력이라는 세계에 몸을 담으면서 시작됐다. 자의보다는 타의다.

인생 개척의 무기 ‘실력 - 도박’
박주선과 노무현 두 사람이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은 박주선이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다.
한솥밥을 먹게됐지만 두 사람의 차이는 계속됐다. 노무현은 16대 총선에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낙선했지만 그의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소신과 도전은 큰 공감대를 얻었다. 이를 통해 그는 호남당의 유력한 영남 정치인으로서의 위상을 만들었다.
반면 박주선은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호남에서 무소속으로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호남의 민주당 일당 지배에 균열을 만들어낸 것이다.
정치권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영남과 호남, 거기에 기반한 유력한 정치인인 YS와 DJ의 성향과 기질 차이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동교동계 출신으로 열린우리당의 고위 당직을 맡았던 한 중진의원은 “DJ계와 YS계는 문화적으로 달랐다”고 말했다. 똑같은 야당을 했지만 YS계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영남 출신으로서 주류적 문화와 행동양식이 지배했다. 그들에겐 거침이 없었다. 때론 뜬금없는 모험과 도전이 가능했다. YS는 정치적 고비에서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에겐 눈치를 살펴야할 이유가 없었고, 실패하더라도 여전히 주류로서의 지위에 손상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DJ계는 소외된 호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외된 세력의 대표였고, 소수파였다. 한 번의 승부수가 실패하면 그것은 곧 나락으로 추락을 의미했다. 그래서 늘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지날’ 정도로 조심하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게 몸에 배어있었다.
YS의 추천으로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 역시 그 성향과 문화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위의 중진의원은 “노 대통령은 YS와 DJ를 똑같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노무현이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몸을 담았던 정치적 토대는 호남이 주력부대인 민주당이었다. 서자인 셈이다.
서자로서 그가 겪었던 가장 큰 수모가 대통령 후보가 된 후였다.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저런 게 어떻게 후보냐’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인간적 수모를 받아야 했다. 대통령 당선 후 곧바로 이어진 민주당 분당과 신당 창당, 대북송금특검을 통한 DJ와의 단절 시도 등이 이같은 배경에서 이뤄졌다.
반면 박주선은 무소속으로 당선됐지만 적자였다. 지역당의 한계를 극복하는게 민주당의 소원이었지만 적통을 무시할 순 없다. 더구나 박주선은 DJ 아성에서 유권자들의 자발적 지지로 당선된 대중적 인기와 경쟁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포스트 DJ’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서자출신이 잡았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이 갈렸다. 그 결과는 현재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서 가해자, 한 사람은 재야의 무관으로서 피해자가 됐다. 앞날은 아직 알수 없지만…….


 󰠙 김대중과 노무현 - 계승과 극복의 이중주
노무현은 YS를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기질은 YS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DJ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노무현에게 DJ는 계승의 대상이면서도 극복과 단절의 대상이었다. 노무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DJ를 평가했다.

나는 YS를 ‘탁월한 정치인’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한 일은 없다. 그러나 DJ에 대해서는 ‘지도자’로 이름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역사의 인물이 된 김구 선생을 제외하고는 역대 대통령이나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서 내 마음 속으로 지도자로 생각해본 사람이 없고 보면, 나로서는 그분을 특별히 존경하는 셈이다.
그러나 가끔 집회 등에서 정치인들이 그분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추켜세울 때면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그건 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끝내 사퇴하지 않은 데 대한 실망, 그리고 89년에 중간평가를 무산시킨 데 대한 불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구 민주당 때는 물론이고 통합 이후에도 곧잘 DJ를 비판하곤 하다가 여러 차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여보, 나좀 도와줘> 노무현, 2002)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도청이 이뤄졌다는 국정원의 2005년 8월 5일 발표를 계기로 전현직 대통령 간 관계가 다시 화제로 올랐다. 일부에서 DJ 단절론, 음모론이 나오자 노무현은 기자간담회를 가진 뒤 “음모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노무현에게 보고될 당시 불법도청이 어떻게, 언제, 누구에 의해 이뤄졌는가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았다. YS 시절과 같은 조직적 불법 도청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일부 불법 도청의 흔적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이를 공개하도록 했다.
DJ를 보호하거나 특별대우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점을 다시 보여준 것이다. 노무현의 태도는 공과 과를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과’중 대표적인 게 지역주의다. 노무현에게 지역주의 극복은 대통령직을 내놓고서라도 이뤄야할 ‘평생의 과업’이다. 그에게 DJ는 극복해야 할 지역주의의 한 축이라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호남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무현에겐 항상 ‘역사적 대의’와 ‘정치적 실리’가 혼재해있다. 역사적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 정치적 실리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의 정치적 승부 뒷면에는 항상 치밀한 정치적 계산과 노림수가 있었다. 그에 대해 국민들이 억지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 뒷면에 가려진 정치적 실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5년 여름 정국을 뜨겁게 달군 노무현의 ‘연정론’이라는 제안에는 진정성이 있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역사인식과 의제 설정은 그의 좁은 정치적 경험과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불행은 스스로가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역사적 인식이 옳으면 그것이 곧 정의이고 진실이고 모든 정치세력과 국민들에게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선’이 된다. 민심을 거역하겠다는 말 속에는 이같은 오만함이 담겨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그의 제안에 정치권과 국민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의 역사인식과 해법이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역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가 특히 그렇다.
노무현에게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의 차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지역주의 극복은 단순하다. 호남당에 몸담고 있는 자신 또는 자신의 세력이 영남에서 당선되는 것이다. 두 지역이 갖고 있는 지역주의의 차이나 역사성은 중요하지 않다.
호남의 지역주의는 저항적 지역주의다. 정치적, 경제적 소외와 불균형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DJ에 대한 지지가 같은 지역 출신에 대한 맹목적인 것으로 폄하될 수있다.
반면 영남의 지역주의는 패권적 지역주의다. 권력에 참여했던 상류층만 혜택을 봤다고 강변하지만 패권적 의식이 영남 출신들에게 남아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노무현의 지역주의에 대한 인식은 패권적 지역주의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지역주의 해법은 일면적이다. 선거제도를 바꿔 각 지역에서 골고루 당선되면 해결된다는 식이다.

‘영남 패권주의’ 벗어나지 못한 ‘노무현식 지역주의 극복’
노무현은 그의 정치역정에서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DJ와 대립하고, 때로는 동거했다. 두 사람은 정치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1990년대 이후 협조와 갈등이라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노무현은 1990년대 내내 ‘3김 청산’과 ‘야권통합’을 무기로 자신의 정치영역을 개척해갔다. 3김 청산에서는 DJ와 갈등 대립하고, 야권통합에서는 반대로 협조와 계승의 관계로 돌아섰다.
노무현이 정치 초년생 때부터 ‘반3김’에 선 것은 아니었다. YS 추천으로 1988년 13대 국회의원이 된 후 김정길, 장석화 등과 함께 민주당 소장파 의원으로 야당통합을 주창했다. DJ의 평민당에 몸담고 있던 이상수, 이해찬이 파트너였다. 이때의 통합론은 ‘YS와 DJ가 결합하는 야권통합’이었다.
1990년 1월 민정·민주·공화 3당통합으로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노무현은 이때 YS를 따라가지 않고 이기택, 김정길 등과 함께 남았다.
이들 민주당 잔류파는 DJ의 2선 퇴진을 조건으로 ‘잔류 민주당’과 DJ 평민당의 합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노무현은 DJ를 인정한 야권통합에서 DJ를 반대하는 통합으로 입장을 바꿨다. YS의 변절이 DJ를 포함한 3김 청산의 길로 가게된 계기다. 영남의 야당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선 DJ와 함께 갈 수는 없었다. 대의명분은 야권통합이었지만, 정치적 실리라는 측면에서는 DJ 배제였다. 그래서 변절한 ‘YS 심판’이 아닌 ‘3김 청산’을 들고 나왔다.
DJ와 노무현이 처음으로 정치적 길을 함께 간 것은 1991년이었다.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DJ 세력이 합당을 하면서다. 합당 후 DJ는 공동 대표, 노무현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92년 대선에서 노무현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DJ를 지원했다.
DJ와 노무현이 다시 갈라선 것은 92년 대선패배로 정계를 떠났던 DJ가 복귀한 1995년. DJ가 국민회의로 분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김원기, 이철, 제정구, 유인태, 김정길 등과 함께 DJ와 정면충돌했다. 이때 다시 노무현은 ‘3김 청산’을 들고나왔다.
노무현이 다시 DJ와 손을 잡은 것은 97년 대선을 앞둔 11월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세력이 대거 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였다. 김원기, 김정길. 원혜영 등과 함께였다. 제정구, 이 철, 김원웅 등은 DJ로의 복귀는 ‘3김 청산을 내세웠던 기존 입장에 위배된다’며 동참을 거부했다. 단절과 계승을 또 한 번 반복한 셈이다.
김대중정권 하에서 노무현은 몸을 낮춰 순응과 계승의 길을 따른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DJ와 동교동계는 차기대권의 도전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줬다. 노무현은 1998년 종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또영남지역의 대표주자로 당내 요직 등을 맡아 정치적 기반을 쌓아갔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무현은 8월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면서 대권 도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장관직에서 물러나 당에 복귀하면서 노무현은 사실상 차기 대권주자로서 대우를 받았다.
당 후보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DJ, 동교동계와 맞설 뻔한 상황이 있었다. 2001년 말 정동영이 권노갑을 타깃으로 정풍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개혁파 의원들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침묵으로 DJ와 측근에 대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정풍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반대로 DJ 보호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동교동계의 지원을 기대한 ‘실리적 계산’에 따른 선택이었다.
2002년 대선후보가 된 후 노무현은 ‘DJ와의 차별화와 계승’이라는 양쪽을 오갔다. DJ 아들 비리가 나오면서 지지도가 급락하자 노무현 측 내부에선 DJ를 정면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쪽과 ‘껴안고 가야한다’는 쪽이 맞섰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자산과 동시에 부채도 인수해야 한다’며 차별화를 부인했다.
하지만 일관된 입장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DJ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햇볕정책’에 대해 “정책시행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고 한계에 봉착한 것 같다”며 “남북한에서 지지를 잃고 있어 이 명칭을 계속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DJ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남북문제에 대한 노무현의 이같은 부정적 태도는 집권 후 대북송금특검과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원칙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시대’를 위한 DJ와의 단절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계승보다는 단절의 측면이 커졌다. 이는 권력을 장악한 노무현으로서는 당연한 시도였다. DJ시대와 다른 ‘노무현 시대’를 열기 위한 열망이 새로운 집권세력을 지배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노무현을 지지했던 강경파들은 대선이 끝난 3일 후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면서 대선 승리에 대해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무현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DJ와 다른 노무현 시대를 열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전북대 교수인 강준만은 당시 노무현의 주요행보를 ‘영남 보여주기  심리’라고 설명했다. 강준만은 <인물과 사상> 2005년 8월호에서 “민주당 분당은 ‘10석을 건지더라도 전국정당을 하겠다’는 명분과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고향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노무현의 강력한 의지가 만들어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표는 호남에서 얻고, 공은 영남에서 들이는 상황에 대한 호남의 반발을 무마하고 선거 때마다 호남표 이탈을 막기 위한 차원에서 김대중에 대한 상징적 예우도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노무현의 태도는 곧 민주당에 몸을 담고 있었던 정치세력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노무현과 박주선의 운명이 엇갈릴 또 하나의 지점이었다.
동교동계 출신으로 열린우리당 고위당직자를 지냈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DJ와 노무현의 관계를 설명했다.

“노무현은 DJ와 똑같이 YS를 생각한다. YS가 DJ와 차별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똑같이 민주화 투쟁에 기여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여당 후보로 당선된 후 곧바로 YS를 찾아가 YS 시계까지 내보이며 인연을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쳤지만 그 후에도 YS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국민의 정부 국정원 도청 사건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YS만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DJ시절에도 도청이 있었다는 보고를 하니까 바로 공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다 여론이 악화되니 군사독재 시절에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화살을 돌리기 위해 과거사 문제를 들고 나왔다.”


 󰠙 DJ와 노무현, 박주선의 2002년 대선
2002 대선 승리가 노무현만의 승리일까.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풍’이 일면서 일패도지한 이인제측은 ‘청와대 음모론’을 제기했다. 박지원 등 정권실세들이 개입, 노무현에 대한 지지도를 끌어올렸고 연청 등 DJ 직계 조직들이 노무현을 지지해 노풍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근거 없는 정치적 의혹 제기였다. 이미 DJ는 민주당을 탈당한 시점이었다. 또 아들비리로 인해 국민들의 반감이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DJ는 레임덕에 빠져 무력한 상태였다. 대선후보들은 오히려 DJ를 멀리해야 할 처지였다. 청와대 음모설 역시 ‘DJ = 노무현’ 일치화를 통해 노풍을 꺾어보려는 술책이었다.
더구나 차기정권 창출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려던 동교동계는 대세론을 형성했던 이인제 측에 가까웠다. 조재환, 이훈평 등 권노갑과 가까운 의원들이 이인제 캠프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노무현의 당선은 시대정신의 승리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정신은 노무현이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 흐름에 몸을 얹었을 뿐이다. 이 시대흐름을 만든 데는 DJ의 역할도 지대했다. 이 점에서 ‘DJ 음모론’이라면 설득력이 있다.
2002년 대선은 냉전수구세력 대 평화개혁세력, 낡은 정치 대 새로운 정치의 대결구도였다. DJ정부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남북간 화해와 협력, 변화와 개혁은 이미 피할수 없는 대세였다. 여기에 소신과 원칙,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일관된 정치행보를 해온 노무현이라는 개인이 얹혀져 폭발력을 만들어냈다.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 개혁과 변화라는 흐름과 대선 구도는 DJ의 역할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때 대북 평화와 화해, 협력 정책은 여권의 전매특허였다.
이에 반해 야당은 DJ와 대립각을 세우며 대북강경정책을 주장했다. 야당의 공세는 집요했다. 시도때도 없이 불거진 색깔론, 그리고 대북 퍼주기라는 비난 공세를 펼쳤다. 그렇지만 DJ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일관되게 대북화해정책을 밀어붙였다.
‘햇볕정책의 전도사‘라고 불리운 임동원 해임건의안에 대해 JP라는 집권기반의 한 축을 버릴 정도로 DJ는 단호했다. 대북정책에서 후퇴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그 결과 정국의 불안정성은 커졌지만, 냉전수구세력 대 평화개혁세력이라는 대결전선은 명확해졌다.
대북정책에서만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는 기초생활보장제 등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가진 자 대 서민’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냈다.
공도 있었지만 과도 있었다. 임기 후반기를 장식한 비리게이트가 그것이다. 여권 실세들의 연루의혹, 아들들의 비리로 인해 DJ정권과 개혁세력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
DJ를 버리고 갈 것이냐 안고 갈 것이냐는 대선을 앞둔 노무현 측의 최대 고민이었다. 잇단 지방선거와 재보선 패배는 이같은 논란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대선은 과거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어느 후보가 적임자인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곧 변화와 개혁의 길을 갈 것인가, 수구 보수세력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였다. 답은 간단했다.

박주선, 동교동계의 ‘이인제 추대’ 저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한때 60%가 넘었던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했다.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노무현을 구해준 것은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내 정치세력들은 다양한 태도를 보였다. ‘반노’와 ‘친노’세력의 대립이 이때 등장했다. 이 대립에서 중도파가 설 땅은 없었다. 대선이 끝난 후 박주선은 친노세력에 의해 역적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박주선의 활동을 보면 반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노에 가까웠다. 다만 친노 진영에 합류하지 않고 중간에 서서 그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완장을 찬 친노세력은 이같은 중립적 입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박주선의 관계는 공적인 관계였다. 개인적인 호불호는 작용하지 않았다.
박주선은 ‘공정한 경선 - 대선승리를 위한 후보단일화 - 민주당 후보로의 단일화 -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정권재창출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경선과정에서부터 대선까지 너무 많은 우여곡절과 위기를 거쳤다. 정통성을 가진 당 후보에 대해 당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까지 팽개친 인사가 너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진영은 경색됐다. 이는 주변세력에게 양극단의 선택을 강요했다. 노무현 개인에 대한 충성도가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중요한 잣대가 됐다. 노무현과 박주선의 이후 갈등과 대립이 여기에서 형성됐다.
민주당의 주류였던 동교동계는 노무현에게 비우호적이었다. 동교동계는 차기정권 창출을 위해 2001년 10월 ‘중도개혁포럼’이라는 당내 조직을 만들었다. 당내 최대계보였던 이 조직은 총재 특보, 원내총무를 지내며 여전히 여권의 실세로 살아있었던 정균환이 조직했다.
차기정권 창출을 요리하기 위한 첫 시도가 민주당 후보 경선을 앞두고 나타났다. 중도개혁포럼에서 이인제를 대권후보로 공식 지지하자는 결의를 이끌어내 ‘대세론’에 불을 붙이려 했다.
이를 동교동계 권노갑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도했다. 중도개혁포럼이 어느 정도의 결속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의문이었지만, 당내 역학구도가 한쪽으로 쏠릴 수 있는 대선후보 경선의 한 고비였다.
이를 막아선 사람중 한 사람이 박주선이었다. 박주선은 “국민경선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중도포럼은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일부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이인제 진영에 합류하는 것으로 경선을 맞았다.
당시 박주선이 특정후보 지지를 막아선 이유는 노무현에 대한 인연이나 호불호, 또는 지지 때문이 아니었다. 제도적 절차인 국민경선제의 취지를 살려 공정한 경선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같은 박주선의 태도는 후보경선과정에서도 관철됐다. 후보경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들은 각 지구당을 순회하며, 대의원들을 만나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경선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노무현의 인기는 높지 않았다. 이회창 대세론이 득세하는 가운데 대선승리에 대한 불투명성, 자질론 등이 그의 약점이었다.
더구나 민주당 대세론은 이인제가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의원들이 이인제 진영에 몸을 담았다. 그래서 노무현은 지구당 방문에서 썩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시절, 그가 환대를 받은 곳이 있었다. 박주선이 위원장으로 있었던 화순과 보성이다. 이백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웠고, 그에 대해 깎듯한 환대와 격려가 있었다. 그간 지구당 방문에서 푸대접에 시달리던 노무현으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화순·보성지구당의 노무현 환대는 박주선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 당의 출마자이므로 예의를 갖추고, 열렬한 환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역시 노무현에 대한 지지여부와 관계없이 당의 경선후보에 대한 예우였다.

‘민주당 후보 중심 단일화론’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보 단일화를 하되, 민주당 후보인 노무현으로의 단일화를 주장했다.
노무현의 지지율 급락은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승리를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노무현 진영에 후보단일화를 얘기하면 그것은 곧 역적이었다.
노무현 흔들기를 위해 이를 이용한 세력 때문이었다. 당 내부에는 정통성을 가진 후보였던 노무현을 부정했던 세력이 있었다. 소위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라는 조직이 그랬다. 이들은 애초부터 노무현에 대해 못마땅했다. ‘노무현 후보 흔들기-정몽준으로의 단일화’라는 성격이 강했다. 당내 이런 세력이 적지 않았다. 김민석 등은 이미 정몽준 진영에 투항했고, 일부 의원들은 탈당했다.
반노인사를 제외한 당내 대다수 후보단일화론자들은 수구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개혁평화세력의 집권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단일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진영은 노무현에 대한 배신으로 치부했다.
단일화를 선언한 사람은 노무현이었다. 결론은 같았지만 과정에서의 차이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노무현 진영의 박주선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는 이때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주선은 후보단일화를 앞둔 시점에 전남대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 때 박주선은 “노무현으로 단일화 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중들 앞에서의 공개적인 정치적 입장 표명이었다.
박주선은 민주당원으로서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선거운동의 주체는 민주당이다. 또한 정몽준으로 단일화가 되면 이회창의 집권을 막는다는 소극적 의미 이상을 가질 수 없다. DJ정권의 업적을 계승해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선 민주당이 지원하는 후보가 돼야한다. 이것이 당시 박주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진영의 눈길은 싸늘했다. 박주선은 늘 중립지대에 있었다. 당 경선시 공명선거 관리위원장이었고, 후보단일화 국면에서는 신당추진위에 몸을 담고 있었다. 신당추진위는 지방선거 패배 후 민주당으로는 안된다며 노무현의 동의하에 만들어진 신당추진기구였다.
신당을 만들면 후보 경선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 있었다. 그래서 노무현 진영에선 신당추진기구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대선운동기간 박주선은 제1정조위원장으로 정책분야에서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이 역시 민주당과 그 당 후보였던 노무현에 대한 선거운동이었다. 박주선은 12차례의 각종 언론 정책토론회에 참석하고, 노무현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노무현은 단기필마로 대권에 도전했다. 노무현의 정치는 편가르기를 기본바탕에 깔고 있다. 세력의 많고 적음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명분과 대의를 잡고 이를 위해 분명한 전선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이 구도에서 중도적인 입장이 설 땅은 많지 않다. 현실과 국민여론을 고려한 합리적 선택과 중용의 길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과 대선 후보 경선에서 맞섰던 김근태는 훗날 노무현의 인사스타일과 관련 “후보 처지에서는 선거과정에서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이고 직접 도와주지 않은 사람은 못마땅할 것”이라며 “그러나 나라를 운영하려면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박주선은 정치성향상 중도에 가까웠다.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충성보다는 정권재창출의 대의를 중시했다.
노무현 진영으로선 우군으로 분류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공을 세웠고 어떤 과를 범했는가를 따지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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