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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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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무현과 박주선의 정면충돌 - ‘박주선 죽이기’의 정치적 흑막

작성일09-11-09 09:57 조회4,787회 댓글0건

본문

I. 노무현과 박주선의 정면충돌 - ‘박주선 죽이기’의 정치적 흑막
박주선의 구속은 DJ정권, 노무현정권이 들어선 후 권력교체, 세력교체의 과정에서 일어났다.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DJ정권 하에서는 세력교체를 거부하는 기득권세력의 반격에 의한 희생양이었다. DJ정권의 권력기반은 취약했다. 정치적 다수는 여전히 보수세력이었고, 경제·사회권력 역시 그들 손에 있었다.
DJ정권 세력교체기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이가 박주선이었다. 여기에 맞서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세력은 총반격에 나섰다. 박주선은 그 과정에서 희생됐다.
현재의 권력은 전임권력에 대해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부정적 단절을 통해, 때로는 발전적 부정을 통해 전임권력의 잔영을 지워내며 자기권력의 토대를 만들어간다.
그 점에서 박정희, DJ를 뺀 권력자들은 불리했다. 박정희는 산업화라는 족적을 남겼고, DJ는 산업화 이후의 과제인 민주화, 남북화해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업적 평가에서 두 대통령이 1, 2위를 차지하는 것은 그 자연스런 귀결이다.
나머지 정권과 대통령들은 두 정권의 아류였다. 노무현 정권도 거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권위주의 해체를 업적으로 내세우지만 이는 YS 이후 시작된 민주화 흐름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 노무현이 업적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역시 애초의 의도에서는 상당히 벗어났다.
임기 말로 가면서 노무현의 ‘지역주의 극복’ 등 과도할 정도의 정치개혁 추진에는 ‘독자적인 업적을 만들겠다’는 조바심이 담겨있다.
독자적 업적과 세력을 만들려는 노무현에게 DJ는 걸림돌이었다. DJ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힘’으로 정치세력과 국민들에게 영향력이 지대했다.
정치권의 예상을 깬 대북송금특검법 수용,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은 전임정권과의 단절을 위한 수순이었다. 동시에 DJ정권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단행됐다. 대북송금특검에 따라 대북관계를 주도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철창행을 면할 수 없었다.
박주선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속과 무죄는 노무현 정권의 새로운 집권기반 만들기 과정에서 잉태했다.
권력의 논리는 냉혹했고 힘이 컸다. 법의 논리마저 무력화시켰다. 박주선에 대한 무리한 수사와 법 적용에 의한 구속 기소, 그리고 정치적 무장해제가 이어졌다.

 󰠙 영남 진출 위한 DJ와의 단절  - 대북송금특검법 수용
2002년 대선기간 중 한나라당의 폭로로 대북송금이 쟁점화됐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노무현 측은 적극적인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자기 정권에 부담이 될 것을 예상, 미리 털고가자는 계산에서였다.
노무현이 주도한 대북송금에 대한 조사는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로 당선자 신분이었던 노무현 측의 문제제기에 따라 감사원 감사가 실시됐고 2003년 1월 30일 그 결과가 발표됐다.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4천억 원 중 2천235억 원을 대북송금했다는 사실을 감사원이 밝혔다.
DJ는 이에 대해 사법심사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쟁점은 정부 자금이 포함돼 있었는지 여부와 이 사실을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알았느냐 여부였다. 대통령이 인지하지 못한 통치행위란 인정할 수 없다. 통치행위가 아니라면 관련자들은 응당 의법조치 돼야 한다.
2단계는 2월 14일 DJ의 대국민 담화와 대북창구역을 했던 임동원의 해명이다. 현대 측에 의해 모두 상업적 거래인 5억 달러가 대북송금됐으며, 이중 2억 달러의 송금에 국정원이 편의를 제공했다고 공개했다.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새로운 사실은 모두 2억 달러가 아닌 5억 달러라는 것 뿐이었다. 이 역시 통치행위로 볼수 없었고 관련자들의 의법조치가 불가피했다.
3단계는 노무현의 특검법 수용에 따른 특검수사와 발표다. 특검이 밝힌 새로운 사실은 현대그룹이 부담한 5억 달러 중 1억 달러는 ‘정상회담 대가’였는데 현대 측이 대신 지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박지원, 이기호 등은 산업은행에 대출외압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주목을 끌었던 정부 자금은 동원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통치행위 여부와 관련 DJ가 대북송금 사실을 인지했다고 확인했다.
결국 대북송금이 통치행위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대출외압 뿐이다. 특검은 본인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을 뇌물수수 혐의로 사법처리했다. 이는 대북송금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후 박지원의 혐의에 대해 대법원에서 무죄취지의 파기환송이 있었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결론은 역시 허망했다.


노무현의 측근 문재인 “DJ가 책임져야”
대북송금특검법의 수용과정을 보면 노무현의 DJ에 대한 태도와 왜 그가 특검법을 수용했는지 읽을 수 있다.
2003년 3월 14일. 노무현은 대북송금특별법을 국회에서 의결한 원안대로 공포했다. 그 전날 참모회의에서는 거부권 행사 의견이 많았다. 특검법 수용을 발표한 당일 국무회의에서도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여당인 민주당 역시 ‘조건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당론으로 채택, 노무현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반대 의견을 모두 물리쳤다. 특검법 공포는 사실상 노무현식 계산법에 따른 ‘결단’이었다.
노무현은 반대 여론에 숙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거부권을 행사할 마음이 없었다.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이 특검법 수용을 며칠 앞두고 한 언론 인터뷰는 이를 시사하고 있다. 이 시점은 대북송금사건에 대한 DJ의 대국민사과와 임동원, 박지원 등 관련자들의 사과와 해명이 이뤄진 직후였다.
“충분하지 않다고 보니까 특검이 나온 것 아닌가요. 저 또한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번 특검이 국익에 손상을 준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손상이 오는지 그 내용을 모르겠어요. 다만 국익에 손상이 있을 것이라는 말, ‘그럼직하다’는 추측, 그 정도뿐이죠. 정확히 아는바가 없어요. 그래서 정확히 알기 위해 국회의 선조사를 요구했던 겁니다.”

“지난번 김 전대통령의 발표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 부분까지는 관여하지 않았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분께서 속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외교적으로 필요한 행위’라고 했었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관여한 바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죠.”(<신동아> 2003. 4월호)

문재인은 노무현이 정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이자 최측근이다. 문재인은 DJ에 대한 특검 조사와 사법처리 가능성까지를 염두에 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노무현 측의 특검법에 대한 입장이 어떠했는지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여권 내 노무현 측근들의 특검 수용의사는 문재인 발언 이전부터 간간이 나왔다. 2월 4일 민주당 사무총장이었던 이상수는 교통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조사는 정쟁화할 가능성이 있고 일반 검찰수사는 검찰의 중립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 특검제를 수용해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고 야당이 주장하는 특검제 수용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날 발언에 앞서 이상수는 문재인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특검제 발언이 노무현 당시 당선자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는 관측이 정치권에서 흘러나왔다.
비슷한 시기 민주당 내 친노세력은 DJ를 향한 공세를 펼쳤다. 신기남은 “진실을 밝히고 국민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DJ가) 추가해명을 안하면 특검으로 가게 되고 결국 다 밝혀진다”고 DJ를 압박했다.
특검법의 정식 명칭은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북 비밀송금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다. 3월 14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예상을 깨고 특검법 수용을 결정한 노무현은 “야당에 신뢰를 주고 약속한 바대로 야당이 법을 수정한다고 하니까, 그걸 믿읍시다. 도박같은 결단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뢰를 위한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에서 나타난 특검법 수용은 남북관계의 앞날에 대한 고려보다는 ‘국내 정치용’이었다.
노무현의 표현대로 그것은 ‘도박’이었다. 국내정치에서의 도박이 아닌 민족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다. 이때 북핵문제는 위기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대북송금특검은 한국의 북핵 해결 주도권을 위한 창구와 지렛대의 상실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치권의 관측은 거부권 행사가 대세였다. 민주당은 의원총회에서 ‘조건부 거부권 행사’를 의결했고, 대표였던 정대철이 이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한나라당 역시 거부권이 행사될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대비책 마련에 나섰다.
그렇지만 대다수 예상을 깨고 노무현은 ‘거부권 행사’와 ‘특검 수용’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야당과의 신뢰라는 정국 운영 구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노무현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특검법 수용 며칠 전 노무현은 13명의 개혁진영 원로들을 만나 특검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함세웅 신부와 김지길 목사, 청화 스님 등 참석자 대부분이 특검제를 수용해선 안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안동과 의성 등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해온 류강하 신부(가톨릭 상지대 학장)는 “대구·경북 여론은 특검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처지가 안타깝지만 특검을 수용해 정면돌파를 하는 게 노무현답다는 여론이 많다”고 수용론을 주장했다.
특검제를 수용키로 했던 3월 14일 임시 국무회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의견을 밝힌 장관은 모두 7명. 이 가운데 정세현(통일), 강금실(법무), 한명숙(환경), 지은희(여성), 윤진식(산자), 김영진(농림) 등 6명이 특검법을 수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딱 한 사람만 의견이 달랐다. 부산 동아대 교수 출신인 허성관(해양수산부 장관)이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정국이 파탄난다.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한다”며 특검법 수용을 주장했다. 허성관은 초·중·고교를 광주에서 나왔지만 경남 마산 출생이며, 부산 동아대를 나와 ‘PK’정서에 밝은 편이었다.

민족문제 도외시한 국내정치용
노무현은 특검법에 대해 다수 의견을 물리치고 소수 의견을 선택했다. 그 소수 의견은 부산·경남(PK)과 대구·경북(TK) 등 영남지역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승부를 해왔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지역주의 극복 해법은 단순하다. 영남에서 그 또는 그의 세력이 지지를 받고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영남인의 환심을 사야 한다. 남북문제와 북핵이라는 민족적 과제와 위기도 후순위였다. 더구나 남북문제는 전임자인 DJ의 업적이었다. 아무리 그가 남북문제에 공을 들여도 역사적 공은 DJ에게 돌아간다.
‘역사에 남을 대통령’에 대한 노무현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게 2005년 8·15 경축사였다. 당시 북쪽에서 대표단이 왔고, 1년 이상 교착상태였던 남북문제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었다.
정치권의 예상은 남북문제에 대해 뭔가 언급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남북문제나 경제 등에 대해선 단 한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남의 업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신 노무현은 과거사 정리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연정론을 거듭 제안했다.
열린우리당 고위 당직자는 “노 대통령은 ‘장물’이라는 표현을 잘 쓴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자신의 업적 만들기에 대한 노무현의 의욕을 설명했다. 지역구도 등 ‘정치 구조와 문화를 개혁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싶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영남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집권 직후 시작됐다. 내각과 검찰 인사에서 영남에 대한 배려는 섭섭하지 않았다. ‘PK정권’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청와대 역시 상층부부터 행정관급에 이르기까지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대거 진출했다.
노무현식 정치구도는 ‘지역정당 구조 타파 = 자신이 속한 정치집단의 영남진출을 통한 전국정당화’였다. 이를 위한 대야 협상방안으로 중대선거구제로 전환되면 다수당에 총리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통한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충격적 해법이 이때 이미 마련됐다.
이는 영남을 잡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대북송금특검법 역시 노무현의 그와 같은 정치적 신념을 위한 제물이었다.
노무현의 대북송금특검법 수용 결과는 참담했다. 어렵게 쌓아올린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급속하게 냉각됐다. 또한 대북관계의 주도권이 북핵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미국 손에 들어갔다. 이후 1년 이상 남북관계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북핵이라는 국제적 위기가 지속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6·15정상회담과 DJ의 햇볕정책을 되살린 것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북한에 의해서였다.
북한은 평양에서 열린 2005년 6·15 공동행사에 DJ 측 인사들과 통일부 장관인 정동영을 초청했다. 남북관계 복원을 위해 노무현 정권은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6·15 정상회담, DJ의 햇볕정책과 그것을 추진했던 DJ 인사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대모험- 민주당을 해체하라
“제가 직접하지는 않겠지만 정계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정치권이 새롭게 편성될 텐데 그에 대한 준비도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정치의 틀을 바꿔나가는 것입니다.”(<신동아> 2003년 신년호)

‘취임 1년 동안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과제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노무현의 답이다. 이후 민주당은 신당 바람에 휩싸였다. 노무현식 정치권 재편의 시작이었다.
노무현의 신당 추진은 대선 전부터 시도됐다. 2002년 여름 선대위의 본부장 등 40여 명이 모여 토론을 했다. 천정배, 신기남 등이 신당창당을 주장했다. “호남에서 잃는 것이 있더라도 영남에서 더 많이 얻을 것”이란 취지로 신당을 주장했다. 논의는 신중론이 나오면서 유야무야 됐다. 대선을 앞둔 일정상의 어려움 때문이었지 그 취지가 거부된 건 아니었다. 이때 제안된 ‘탈호남 탈DJ 신당론’은 노무현 집권 후 추진된 신당의 모태라고 할 수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세력 교체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DJ정권 때도 그랬고 YS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로는 사정의 칼날을 이용한 대대적인 숙청, 반대로 당근으로 회유하는 일도 있었다.
노무현은 인사권을 이용해 대부분의 공직기관은 접수했다.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은 PK를 중심으로 한 영남인맥이 핵심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남은 건 국회와 여당이다. 문제는 이곳에는 대통령의 인사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인위적 숙청이 불가능했다. 신당을 통한 당 헤게모니 장악, 그리고 1년 2개월 뒤의 17대 총선을 향해 속도를 내야 했다.
대선 승리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2002년 12월 22일. 대선이 끝난 지 3일 만이었다. 민주당 조순형, 신기남 등 의원 23명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창하고 나섰다. 이들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니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해온 낡은 정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또 “지역분열 구도와 낡은 정치의 틀을 깨기 위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민주당은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에 참패했음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 국민으로부터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며 “17대 총선에서는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는 후보를 공정하게 선출, 국회를 획기적으로 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당시 당선자 신분이었던 노무현은 “속도와 절차가 좀 조절됐으면”하는 의견이지만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책임이 있는 세력과 인사들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하며 민주주의 원칙을 부정했던 기회주의적 구태정치 행태도 단호하게 심판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동교동계, 그리고 노무현에게 적대적이었던 후보단일화협의회 세력에 대한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이어 민주당 해체와 신당 창당을 위한 지루하고 지난한 투쟁이 시작됐다.

인적 청산과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신당
노무현의 당선은 낡은 정치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담고 있었다. 정치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였다. 민주당 역시 이 흐름에서 피해갈 수 없었다.
노무현측의 신당 명분은 정치개혁과 전국정당화였다. 노무현의 세력교체가 명분을 갖고 추진될 수 있는 토대였다.
그러나 노무현측의 신당 추진은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미래지향으로 가지 못했다. 그보다는 당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인적 청산과 권력투쟁으로 흐르면서 내분과 분당으로 치달았다. ‘시대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대의보다는 노무현 정권 출범에 따른 ‘권력투쟁’ 양상으로 흘러간 것이다.
2003년 1월 한 언론에서 집권 후 2004년 총선까지 1년 2개월 동안의 개혁 프로그램을 골자로 한 ‘정당개혁 프로그램(안)’이라는 문건을 공개했다. 노무현의 핵심측근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문건은 첫장에서 2002년 대선을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대한 사망선고’로 결론 짓고, ‘민주당의 혁신적 변화는 새 정부의 성공과 2004년 총선 승리를 위한 기본 토대’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정의했다.
문건은 ‘신당 창당도 준비해야 한다’며 신당 창당 프로세스를 상정해놓았다. 상징적 원로 및 개혁적 원외 위원장 ‘일부 세력이 개혁당으로 입당’하고 ‘의사 관철이 불가능할 경우, 민주당 내 세력 50% 이상을 이끌고 탈당 후 개혁당과 합당’이라는 시나리오였다. 민주당 분당과 신당 창당은 사실상 이 프로그램대로 진행됐다.
신당 창당은 ‘개혁신당 - 통합신당 - 리모델링’ 등의 복잡한 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분당에 이은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결판났다. 2003년 12월 민주당 해체론이 나온 후 열린우리당 창당에 나선 9월까지 약 10개월의 긴 시간이었다. 집권당으로서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은 내팽개치고 ‘식물정당’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신당 만들기에 ‘올인’했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 데는 두 세력의 책임이 컸다. 동교동계 등 기득권을 가진 구세력들은 호남 지역주의와 DJ에 기대어 정치개혁 추진을 방해했다.
신당을 추진했던 신주류세력의 책임은 그보다 훨씬 컸다. 초반 대세는 신당세력에게 있었다. 그들에겐 정치개혁과 민주당 개혁을 바라는 명분과 민심의 지지가 있었다. 또한 대선 승리와 노무현의 지원이라는 현실적 권력이 있었다. 누구도 선뜻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당 추진 초반엔 신주류가 파죽지세로 민주당을 접수하고, 이에 저항하는 구세력은 일패도지(一敗塗地)로 정치생명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은 듯 보였다. 구세력은 수구 기득권 이미지에다 대선과정에서 자당 후보를 흔들었다는 원죄가 있었다.
막상 신당 작업이 시작되면서 형세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두 세력이 백중세를 이룬 것이다. 원인은 신당세력의 정치력 부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들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거사했다. 신당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치말한 전략을 세워 공론화와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금, 조직, 반대파 제압 등 모든 면에서 준비가 없었고 미숙한 정치력을 드러냈다.
신당이 될만하면 어김없이 터져 나온 ‘누구누구는 찍어내야 한다’ ‘누구누구는 함께 갈 수 없다’는 실수가 터져나왔다. 노무현의 측근인 대구 출신 이강철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신당 동승 불가 5인방, 15인방’ 등의 언급은 인위적 세력교체와 청산이라는 비난을 받아 신당 창당의 동력을 떨어뜨렸다. 신기남은 “선혈이 낭자하더라도 신구주류간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고 권력투쟁을 부추겼다.
신당세력 중 강경파들의 계산은 신당을 만들어 개혁당과 한나라당 탈당파, 재야개혁세력과 연대하면 다음해 총선에서 필승할 것이란 낙관론에 근거했다. 개혁당이나 한나라당 탈당파와의 연대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개혁당, 한나라당 탈당파들은 ‘반DJ’, ‘반호남주의자’들이었다.
노무현은 2005년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와 영수회담에서 “열린우리당 창당은 호남당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경파들의 주장과 맥이 닿아있다.

“10석만 얻더라도 전국정당화 돼야”
신당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핵심은 ‘DJ와 호남’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영남권에 어떻게 진출할 것인가였다. 당시 신주류 강경파였던 이강철은 공사석에서 스스럼없이 “호남에서 10석을 잃어야, 영남에서 10석을 얻는다”고 말했다. 호남 독식체제로는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을 수 없는 만큼, 영남에서 단 몇 석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호남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신당 추진 한 핵심 인사는 “호남소외론이 더 확산되고, 구주류가 신주류를 더 공격해야 한다. 호남쪽이 흔들흔들해야 영남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지역주의이고, 호남 소외 전략이었다.
노무현 역시 자신의 고향인 부산 출신 인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속내를 털어놨다. “10석만 얻더라도 전국정당화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경파는 겉으로는 DJ의 업적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결별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DJ와 구주류 세력을 한데 묶어 용도폐기해야만 진정한 정치개혁, 구시대와의 단절이 이뤄진다는 논리다. 이 점에서 민주당내 강경파 일부, 노 대통령 측근인 청와대 386참모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당시 민주당 한 관계자의 증언은 노무현 측의 호남과 DJ에 대한 태도를 엿볼수 있는 단서다.

“신주류 내에서도 DJ와 동교동계를 하나로 볼 것이냐, 아니면 분리해서 볼 것이냐는 시각차가 분명히 있다. 통합형 신당론을 펴는 온건파들은 분리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주류 내 일부 강경파와 이부영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이강철 등 노 대통령 측근 그룹,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른 부산파 등 DJ에게 빚진 것이 없거나 오히려 당했던 사람들은 DJ와 과감한 결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DJ와 명시적으로 갈라서자는 소리는 아무도 안하지만 선거전략상 결별해야 영남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는 일정한 흐름이 분명히 있다. DJ를 포함한 호남 고립화 전략이다.”

부산의 노무현 사단은 신당 추진의 강력한 추동력이었다. 고향 출신인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산 지역구에서의 당선이라는 오랜 숙원을 풀 기회였고, 자연 이들의 행보에 힘이 실렸다.
부산 노무현 사단은 부산지역에서 신당이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노무현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60% 이상을 상회할 것, 둘째 신당이 호남당과 DJ 이미지를 완전 탈색할 것, 마지막으로 부산 한나라당 현역의원의 공천 교체율이 저조할 것이다.
당시 청와대 생활을 접고 부산에서 출마를 준비 중이던 청와대 정무2비서관 출신 박재호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결국 호남출신 동교동계 의원들이 주축이 된 구주류가 도태되고 민주당 신주류와 한나라당 탈당파, 부산·경남지역 인사들이 신당의 주도권을 잡는 형국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2003년 초 부산에서 열린 신당 추진 전국토론회에서 부산 인사들은 “DJ는 청산 대상이지 계승대상이 아니다”, “호남의 민주당으론 총선에서 죽어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DJ와, 동교동계가 주축인 구세력과의 결별은 그 핵심내용이다. ‘과거 단절’의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지지층이 넓어질 것이란 게 신당추진세력의 판단이었다. 당연 ‘코드’가 맞는 사람만 신당호에 승선시키자는 인적청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03년 9월 4일 당무회의에서 구세력의 물리적 저지로 통합신당은 물 건너갔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신당 지지 - 친노세력의 집단탈당 - 노무현 대통령 민주당 탈당 - 신당창당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 󰠙 반DJ의 선봉들, 친노 진영에 합류
열린우리당은 크게 보면 3개의 세력이 합쳐진 당이다. 민주당 분당세력, 한나라당에서 이탈한 세력, 그리고 유시민 등이 주축이 된 개혁당파였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세력은 극단적인 ‘반DJ 반호남’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반DJ는 개혁보다 상위 개념이었다. 대표적인 이가 이부영, 이우재다.
이들은 영남 패권주의에 의한 피해자로서의 호남,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저항적 지역주의, 그리고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영남 후보였던 노무현을 당선시킨 호남의 ‘전략적 선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시민으로 대표되는 개혁당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유시민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 필패론’을 주장했다. 17대 국회에서 지역주의 극복의 전도사처럼 행동하지만 ‘지역주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DJ는 안된다는 게 당시 그의 주장이었다.
유시민은 <97대선 - 게임의 법칙>이라는 책을 써 그의 주장을 널리 알렸다. 내용은 이른바 DJP 필승론은 이론적 실증적으로 볼 때 승률이 제로에 가까운 게임이므로 ‘제3후보’를 내세워 ‘승부를 알 수 없는 싸움’인 대리전을 치르라고 충고했다. 그에게 개혁 대 반개혁, 정권교체의 대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책에는 DJ가 아닌 ‘제3후보’를 주장하기 위한 억지와 궤변으로 가득차 있다.

내가 국민회의에 대해 ‘대리전을 권유하는 것은’ 누가 될지도 모르는 신한국당 후보보다 김대중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꼭 김대중을 찍어야할 필요성이나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승부를 미리 알 수 없는 싸움’이 되는 것은 이번 대선이 각계각층 국민의 이해와 생각을 반영하는 ‘정책선거’가 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서울시장 선거의 진행과정과 결과를 볼 때 조 순 시장이 앞서 말한 제3후보의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김대중이 ‘조 순을 통한 대리전’을 하기로 결정할 경우 ‘김대중 대통령’의 꿈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지만, 김대중 지지자들이 전폭적으로 그 결정을 환영하리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나는 이 유권자들이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김대중이 다시 출마해도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체득했으리라고 믿는다.

‘대리전’에서 필요한 인물은 ‘김대중보다 나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한 손으로는 김대중의 고정표를 남김없이 받아 챙기면서, 다른 한손으로 ‘김대중이 싫어서 딴 데가서 노는 야권표’를 끌어오기만 하면된다.(<97 대선-게임의 법칙> 유시민, 1997)

유시민의 주장은 DJ에 대한 반감의 원인이나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진단이나 극복 의지는 전혀 없다. 지역주의의 피해자 DJ에게 당신은 안되니 대리인을 내세울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영남 패권주의의 연장선상이다.

이부영의 대변신
2002년 대선 후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 이우재 등은 민주화운동 출신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군사독재정권의 후예인 한나라당에 가 있었을까. 그것은 3김 청산을 표면에 내건 반DJ 정서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반DJ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정치적 가치였다.
대표적인 이가 열린우리당에서 당 의장까지 지낸 이부영이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DJ가 국민회의로 분당해 나간 뒤 잔류 민주당은 두 세력으로 분화했다. 노무현, 김원기 등은 통합추진회의를 만들었고, 97년 대선 전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우선한 선택이었다.
이기택, 이부영 등 남은 세력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과 합당, DJ 공격수로 나섰다. 이부영은 합당을 통한 신한국당 세불리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97년 대선에서 DJ 집권 저지를 위해 발로 뛰기 시작했다. 이철, 제정구, 김홍신 등과 유세단을 조직하여 곳곳을 누비며 이회창 당선을 외치고 다녔다.
결과는 DJ 당선이었다. 그때부터 이부영은 거대야당의 DJ공격수로 변신했다. 그는 총재직에 복귀한 이회창의 측근으로서 대여투쟁을 주도했다. ‘야당파괴저지투쟁위’ 위원장, 원내총무 등 요직을 맡아 반DJ 투쟁을 이끌었다.
이부영은 정국을 파행으로 몰아갔던 장외집회의 단골 연사였다. 그의 당시 발언록을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따지기 앞서 섬뜩할 정도의 용어를 동원, DJ를 비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광주시민들의 피의 대가로 20억 원을 전달해 준 김중권 비서실장과 함께 부정부패의 몸통과 마당쇠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천헌금을 받아 챙겨 치부하고, 어마어마한 가족 무덤을 만들고, 일산에 아방궁 같은 집을 짓고서도 자기는 깨끗하다며 사기를 치고 있다.”
“제정구 의원은 김 대통령에게 억압받다 속이 터져서 ‘DJ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자기 밑의 특정 사람만 중용하고, 구조개편을 하면서도 가까운 사람만 갖다놓는 썩어빠진 김대중 정권을 심판하자.”

이부영의 김대중 죽이기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2001년에는 YS에게 DJ 비자금을 밝혀달라고 부탁하자는 말까지 서슴지않았다.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김대중 대통령 비자금 관련 사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자. YS와 DJ가 서로 겨루기만 하다가 사건의 본질이 덮어지는 것 아니냐”고 발언했다. 한나라당 온건파들조차 만류한 발언이었다.
그는 반DJ를 위한 투쟁에서 이회창의 최측근이었지만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내 이회창 친위세력이 등장하면서 2선으로 밀려났다.
그런 그가 한나라당을 탈당, 민주개혁세력의 일원으로 탈바꿈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다. 개혁세력의 결집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반호남 반DJ’라는 공통점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 󰠙 노무현과 박주선의 정면 충돌 - 호남의 정치적 구심을 제거하라
참여정부 들어서면서 박주선을 도왔던 많은 인사들이 검찰에 불려갔다. 박주선과 그의 친인척들에 대한 계좌추적은 말할 것이 없었다. 선거 때 그를 도와준 80여 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간단했다. 박주선에게 돈을 준 사실을 불라는 것이었다.
조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박주선의 청와대 법무비서관 재직 시절 국영기업체 임원 인사는 그의 소관이었다. 이 시절 임명된 인사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다. 부영건설 등 호남출신 기업인 수사 때마다 박주선과 관련성을 캐기 위한 강도 높은 조사가 이뤄졌다. 이때 조사를 받고나온 한 기업인은 “박주선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고 토로할 정도였으니 조사의 강도를 가히 짐작케 했다.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주선을 잡기 위한 표적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의 총력전이 펼쳐졌다.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은 없었다. 검찰로선 물러설 수 없었다. 박주선을 잡기 위한 권력의 의지는 그만큼 강했다. 그 결과는 모두 무죄로 끝난 ‘나라종금 사건’과 ‘현대건설 사건’이라는 무리수였다.
두 사건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선 검사들이 ‘죄가 되지 않는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검찰 수뇌부는 이를 무시하고 구속과 기소를 강행했다.
나라종금 사건에 대해 수사검사가 “이 사건은 기소해도 무죄가 선고될 것이므로 검사 양심상 기소를 못한다. 상부에 이야기 좀 하라. 왜 기소를 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검사의 예견대로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 구속영장 심사 단계에서부터 사실상 무죄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 수뇌부의 관심은 유무죄가 아니었다. 사전구속영장 신청, 국회에 체포동의안을 제출해 박주선에게 ‘비리’의 낙인을 찍었다. 박주선을 정치적으로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일련의 수순이었다.
현대건설 관련 사건 역시 담당 검사는 “후원금 처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파악해서 수사를 했다. 죄가 안된다. 기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또한 변호인을 통해서 기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6일 대검 중수부장이 변호인을 통해 ‘박주선에 대해서는 구속영장 청구를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나 검찰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박주선을 구속했다. 무슨 힘이 작용했을까.
노무현 정권은 왜 정권출범과 동시에 ‘박주선 죽이기’에 혈안이 됐을까.
참여정부 초기 국정원 고위 간부의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호남의 대표주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조사했다. 박주선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 간부는 이를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정치인에게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응당 축하의 말이 뒤를 이어야한다. 그러나 이 간부의 다음 말은 “몸 조심하라”였다. 그는 이미 이 조사의 목적과 배후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박주선의 주변 사람들이 고초를 겪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노무현 측은 집권하자마자 DJ와 호남세력의 청산을 빠르게 진행했다. 정부 공직에서는 인사권을 통해, 정치권은 신당 추진을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에게 동교동계는 이미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호남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구시대 정치집단으로 전락했다.
문제는 호남의 ‘포스트 DJ’가 등장하는 것이다. 새 정권이 구상하고 있는 권력재편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를 구심점으로 결집하면 호남 무력화와 영남 진출이라는 그들의 목적은 중대한 차질을 빚는다. 그 싹을 잘라야 했다.
‘포스트 DJ’의 싹은 이미 현실정치권에서 싹 트고 있었다. 박주선은 주목대상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2003년이 시작되면서 호남정치권도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DJ의 동교동계 해체 발언, 한화갑의 차기당권 불출마 선언은 동교동계와 DJ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호남정치질서의 시작을 의미했다.
민심과 정치권은 새로운 대안을 요구했다.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민주당에 입당했던 이정일은 2003년 1월 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포스트 DJ’에 대한 나름의 소견을 밝혔다.
“지역 정치권은 현재 ‘포스트 DJ’ 부재에 따른 지도자 공동화 현상이 우려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진단하며 “구심점을 모색하고 이를 중심으로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정치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일은 “새로운 정치질서 구축을 위해서 초선인 박주선의원이나 이낙연 대변인 등을 키워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낙연은 대선기간 ‘민주당의 입’으로 활약했다. 분당과정에서 민주당에 잔류했지만 친노로 분류된다. 반면 박주선은 독립적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통제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컸다.

‘포스트 DJ’ 박주선에 대한 경계심
박주선은 노무현 정권과 정면대결의 길을 간다. 정치개혁과 사회경제적 개혁을 위한 지향과 노선에서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노무현식 권력재편이 가져올 파괴적, 분열적 결과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권력 재편은 탈호남, 탈DJ라는 지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임 정권에 대한 부정이면서 동시에 노무현을 당선시킨 지지세력에 대한 분열이었다.
박주선은 이를 반대했다. 박주선과 노무현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혼신을 다해 추진하고 있었던 세 가지 지점에서 충돌했다. 대북송금특검, 민주당의 분당, 그리고 영남중심의 주류세력 교체에 대해 박주선은 정면으로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호남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는 그의 공세는 노무현 정권에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북송금특검법’에 대해 박주선은 논리정연하게 거부권 행사를 주장, 당내 공감을 이끌어냈다. 박주선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대북송금특검법 거부권 행사를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많은 의원들의 동의를 얻어냈고, 그리고 민주당은 이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박주선의 주장은 대북송금특검법을 수용한 노무현의 역사관, 논리와는 확연하게 대비됐다. ‘국내정치용’ 대 ‘민족적 대의’의 대비였다. 당시 박주선의 연설을 보면 그의 정치적 소신이 드러난다. 그의 대북송금특검에 따른 남북관계의 경색 우려는 그대로 현실로 드러났다.

“대북송금 사건은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해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이루어진 통치행위이지 개인의 부정부패, 비리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한 예에서 보듯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사법심사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현대의 대북송금사건은 수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대북송금사건은 국가위기 관리 차원에서 대응해야하는 국가적 중대사안입니다. 특별검사제를 시행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한나라당의 의원직 총사퇴, 장외집회, 등원거부 등 정치공세로 국회 기능이 마비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산적한 국정수행이 크게 지장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검제를 시행하게 될 경우 남북관계는 크게 악화될 것입니다. 세계가 우려하고 있는 북핵문제에 대해 우리나라가 주도하는 대화를 통한 해결이 불가능하여,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그동안의 대북투자가 물거품이 될 우려가 높습니다.
한나라당의 반발로 인한 정치적 혼란보다 남북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국가적 혼란이 더 무섭고 심각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나라당의 반발은 종국에 가서 해결가능하나 남북관계의 단절은 회복이 곤란합니다.
개혁은 고통을 수반하고 저항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힘있는 정부라야 개혁이 가능합니다. 야당의 정치공세가 무서워 야당의 주장에 부화뇌동하게 되면 정부와 여당은 향후 아무런 개혁을 할 수가 없고, 국정주도권은 야당에 넘어갑니다. 힘없는 정부여당의 개혁에 아무도 동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와 여당이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앞으로 더 큰 개혁을 위해서 다소의 소란과 파장이 있더라도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한나라당의 무책임한 정치공세에 당당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더 유리한가, 국익을 위해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하는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을 외면한 이상은 무모한 파괴행위입니다. 우리 뒤에는 국민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우리가 어렵고 힘든 길을 걷더라도 역사가 평가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일단 살고 보자’ 중진급 의원들 신당파에 투항
박주선의 나라종금, 현대건설 관련 혐의를 발표한 시점은 민주당 분당과 신당 창당을 위한 고비와 일치했다. 검찰의 나라종금 사건 관련 의혹 발표는 민주당 내 신당논의가 ‘통합신당으로 가느냐 독자신당으로 가느냐’의 갈림길이었던 2003년 5월이었다.
현대비자금 사건을 발표한 시점은 신당파가 분당을 선언하고 딴살림을 차린 9월과 일치한다. 9월 초 민주당 당무회의 파행 후 노무현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신당 창당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몇 명이 가느냐는 초반 신당의 성패를 가름할 고비였다.
박주선에 대한 혐의 공표와 민주당 분당과 신당 추진을 위한 시점의 일치, 이를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있을까.
두 사건 발표 모두 박주선의 혐의를 확인한 후 이뤄진 게 아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먼저 효과를 극대화했다. 언론보도란 게 정치인에겐 무섭다.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혐의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다. 해당 정치인은 보도가 나오는 순간 비리 정치인의 멍에를 뒤집어써야 한다.
박주선에 대한 혐의 발표는 신당 추진과정에서 힘을 발휘했다.
박주선에 대한 혐의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검찰이 수사의지를 밝히자, 신당에 대해 박주선과 노선을 같이했던 거물급 인사들이 속속 신당 쪽에 몸을 실었다. 국민의 정부에서 요직을 거쳤던 N, K가 그들이다. 이름을 대면 ‘아, 그 사람들’하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다. 지금도 여권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능력도 있고, 이미지도 좋았다.
그들은 신당행을 망설이고 있었다. 박주선과 함께 ‘분당 반대 - 민주당 쇄신’이라는 중도입장을 고수하며, 통합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박주선에 대한 혐의 발표 후 이들은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들에게 박주선 사법처리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곧 그들에게 닥쳐올 재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신당 합류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몸을 옮겼다. 검찰의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정치적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호남 출신 중진급의 한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일찌감치 신당행에 몸을 실은 이 의원은 주변에 “(박주선의 구속을) 두 달 전에 알고 있었다. 박주선처럼 감옥 가지 말고 신당에 참여하라”고 말했다.
박주선에게도 고위인사의 신당 합류 권유가 이어졌다. 당시 신당세력의 중심인물이었고, 현정부에서도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중진의원이 사람을 보냈다. ‘모든 것을 잊고 신당으로 오라’는 회유책을 제시했다. 모든 것을 잊으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 이때는 이미 검찰이 수사 의지를 밝히고 있던 시점이었다. 박주선은 이를 거부했다.
박주선의 신당에 대한 입장은 “분당은 안되지만, 민주당의 쇄신 역시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인적 청산에 대해선 인위적 청산을 반대했다. 어찌됐든 국민의 선택을 통해 뽑힌 인사들이다. 이들을 자의적 기준으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다음 해 총선을 통해 국민에 의한 자연스런 교체와 청산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같은 박주선의 입장은 당시 신주류와 구주류간 대립의 중간지점에 서 있었다. 민심 역시 이를 지지했다. 2003년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 광주·전·남북에서 ‘분당해서라도 개혁신당이 필요하다’는 응답자(28.5%)보다 ‘분당하면서까지 신당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응답자(62.1%)가 두배 이상 나왔다.
9월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선 민주당을 탈당한 신당파 의원들에 의해 출범한 ‘국민참여 통합신당’이 ‘지역주의 극복, 정치개혁, 통합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부정적’(49.8%)이란 응답이 ‘긍정적’(31%)이란 의견보다 높았다.
국민들의 바람은 민주당을 개혁하고 물갈이를 하되, 분당에는 반대하는 것이었다. 상당수 의원들의 생각 또한 그랬다.
양극단의 대결에서 중도모임의 존재는 불편했다. 신당세력에겐 신당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존재였다. 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상당수 합리적, 중도적 인사들이 중도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신당을 추진하기 위해선 붕괴시켜야 했다. 그 고리는 박주선이었다.
 
‘지역편중 세력재편’에 대한 박주선의 공세
노무현의 ‘탈호남 탈DJ - 새로운 권력기반 구축’을 위한 고리 중 하나가 ‘영남인맥을 통한 공직사회 지배력 강화’였다.
이를 놓고 박주선은 노무현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2003년 3월 17일 법무부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다.
박주선은 이때 민주당 제1정조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주선은 노무현의 검찰인사에 대해 정면으로 공박했다. ‘평검사의 난’으로 전면적인 인사교체가 이뤄진 뒤였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당시 검찰 안팎에서 노무현의 인사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영남 출신, 그중에서도 노무현의 출신지역인 PK출신들이 요직을 독차지했다. ‘5공때보다 더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반대로 호남출신은 철저하게 배제됐다. 능력이나 자질은 뒷전이었다. 성실하게 일해온 인사들도 예외가 없었다.
박주선은 “특정지역 출신이라고 해서, 능력이나 자질을 따지지 않고 배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노무현 인사를 강력히 비판했다.
면전에서의 공세에 노무현은 묵묵부답했다. 노무현은 자기 주장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자신에 대한 공격에 대해 참지 못하고 장황하게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 사람이다.
그런 노무현이 개혁인사라고 자부했던 검찰인사에 대한 비판에 묵묵부답한 것은 꽤 옹색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여기에 불편해 했는지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노무현과 박주선의 충돌. 노무현 정권으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남의 고립, 신주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그랬다. 어떤 식으로든 손을 볼 수밖에 없었다. 무리수를 둬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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