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 박주선입니다 > 박주선의 이야기 >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5. 노무현·모든 정치인이 사법처리 대상 - 나라종금, 현대건설 사건의 진상

작성일09-11-09 09:58 조회3,923회 댓글0건

본문

노무현·모든 정치인이 사법처리 대상 - 나라종금, 현대건설 사건의 진상

 󰠙 박주선 청문회는 살아있다 -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 3종3금(三縱三擒)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일부에선 불운, 기구한 운명, 풍운아 등 개인의 불행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인권침해였다. 박주선의 세 번의 구속 세 번의 무죄는 모두 검찰에 의한 기소라는 법의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그러나 기소단계에서부터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여론에 의해 좌우됐고, 증거주의 등 수사의 기본과 원칙이 무너졌다. 수사 외적인 요인, 정치적 목적으로 법과 공권력을 동원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권을 보호할 최후의 수단이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로 인한 피해는 말로 다하기 어렵다. 보상과 복구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수십 년을 쌓아올린 명예와 인생의 성과가 부정당했다. 인간으로서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박주선의 세 번의 구속 세 번의 무죄에 대해 검찰은 물론 정권에서도 아무말이 없다.
박주선이 세 번째 무죄를 선고받던 날 언론은 사설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논란의 소지가 있어 결국 무죄가 날 사건들을 모조리 구속 수사하고 그것도 특정 개인에게 그런 일이 연이어 벌어진 것을 그저 단순한 수사착오로만 보아 넘길 수 있을까.
박(주선)씨는 그동안 검찰이 자신을 표적수사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자신이 몸담았던 검찰을 ‘파쇼검찰’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는 이전 정권에서 검찰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랬던 이의 반발이기에 박씨 사건들을 둘러싼 정치적 풍문들이 그칠 줄 몰랐다. 법 이외의 무슨 사연이 있구나 했던 것이다.
박씨는 무죄 선고를 받은 사건으로 지난 5년동안 감옥을 수없이 들락거렸다. 감옥에 있었던 기간을 합하면 1년 가량이다. 국가의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은 박씨 사건이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엄정하게 비춰봐야 한다.(<조선일보> 2005. 2. 21일자. 사설)
문제는 검찰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수를 거듭한 점이다. 당시 검찰이 지도부의 의중과 정치적 분위기에 휩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라는 사법 사상 초유의 기록이 생기는 동안 당사자와 그 가족이 겪었을 심신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라는 말로 그의 응어리가 풀릴 리 만무하다. 긴 세월 수사와 구금, 재판을 거치는 동안 훼손된 박 전의원의 명예와 망가진 인생은 어떤 보상으로도 복구하기 어렵다. ‘검찰 살인’이라는 표현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박 전의원의 경우를 단순히 한 개인의 불운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이는 과거 일부 검찰 지도부의 정치성향과 무리한 수사관행이 얽힌 구조적인 사건이지만 현재의 검찰이 이같은 문제와 완전히 단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찰은 ‘삼종삼금(三縱三擒)’을 치욕으로 받아들여 무리한 수사관행을 쇄신하고 인권보호기관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국민일보> 2005. 5. 22일자 사설)

한때 촉망받던 검사였고 잘나가던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인생은 세 번 구속되는 과정에서 엉클어질 대로 엉클어져 버렸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박 전의원의 훼손된 명예, 상처받은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이냐”며 “두 번째까지 무죄가 나왔으면 검찰이 세 번째 기소를 할 즈음에는 엄격한 증거주의 정신을 상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사람도 망가지고 검찰도 난처한 입장에 빠진 것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문화일보> 2005. 5. 21일자)

박주선에 대한 ‘세 번의 구속 세 번의 무죄’가 행해진 곳은 ‘대검 중수부’다. 우리나라 검찰 내 최고의 검사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중수부에서 기소한 사건은 절대 무죄가 안 나온다는 말이 있다. 유죄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수사에 착수한다는 얘기다.
중수부가 사건이 유죄일지, 무죄일지 검토도 안한 상태에서 수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엘리트라는 검사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있다. 또한 검찰총장이 직접 지휘하는 부서다.
그런 곳에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한사람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려다 실패했다. 법의 적용과 수사, 그리고 기소가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대검 중수부는 최고의 수사기관이라는 영예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중수부는 대검 조직 중 직접 수사기능을 가진 유일한 부서다. ‘검찰청 사무기구 규정 6조 - 검찰총장이 명하는 범죄사건의 수사’ 규정에 따라 총장의 직할부대로 활동해왔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중수부라는 칼은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총장과 중수부장만 장악하면 검찰권의 자의적 행사가 얼마든지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흔들린 대검 중수부
중수부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판단이 필요하거나 나라를 뒤흔들만한 중대사들을 처리해왔다. 동시에 권력의 입김이 작용하거나, 정치적 외압에 무력한 때가 많았다는 비난을 샀다.
박주선에 대해 일선 검사들은 ‘사법처리 불가’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수사 도중 담당 검사가 교체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수부장 안대희, 검찰총장 송광수는 박주선에 대한 수사와 사법처리를 밀어붙였다.
박주선이 세 번째 무죄를 선고 받았을 때 정치권과 언론 일각에선 국정 조사와 청문회에 대한 여론이 일었다. 막강한 형벌권을 가진 대한민국 검찰이다. 그중 최고 조직인 대검 중수부까지 동원해 세 번을 구속 기소했다. 그런데 세 번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무엇이, 그리고 누가 이를 가능케 했을까. 검찰권의 남용과 이를 가능케했던 힘의 근원과 실체를 규명해야 했다. 그래야 제2, 제3의 억울한 피해자를 막고 ‘거짓과 진실이 전도’되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박주선 청문회’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박주선 개인에 대한 해원이 아니다.
검찰개혁은 시대적 과제다. 노무현은 집권 직후부터 검찰개혁에 대한 소신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지는 검찰의 반발과 정치권의 무기력에 의해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박주선 청문회에 대해 정치권은 곧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검찰을 상대하는 짐을 떠안기를 원치 않았다.
정치권이 가장 무서워하는 곳이 있다. 바로 검찰이다. 막강한 형권을 가지고 있다. 검찰권 남용에 대한 비판과 검찰개혁 목소리가 높지만 막상 이를 자신있게 주장하는 정치인은 없다. 검찰이 두렵기 때문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는 말 한마디에 소신과 원칙은 사라져 버린다.
그들에겐 박주선이 반면교사(反面敎師)일지 모른다. 박주선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검찰은 없는 죄를 만들어 그를 세 번이나 가두었다. 응당 이같은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한 제도적 대책과 진실규명이 최우선 과제다.
국정조사가 열리면 노무현정권 들어 박주선을 구속기소했던 당시 중수부장 안대희와 검찰총장 송광수 그리고 그 계선상의 수사 관련자들의 책임소재를 먼저 가려야 한다. 이들은 노무현정권 초기 검찰의 핵심세력이다. 그들과 맞서는 건 보통의 각오로는 안된다.
검찰개혁을 논의해야 할 주체인 정치권이 오히려 검찰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처지가 된 것이다. 
박주선의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의 진상규명과 배후 규명의 1차 기회는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노무현정권은 살아있는 권력이다. 박주선을 구속했던 검사들은 여전히 검찰 내 고위직에 포진해있다. 그들 역시 살아있는 권력이다.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진상을 규명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진실은 밝혀질 수밖에 없다. 영원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박주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2005년 3월 30일 김종빈 검찰총장 내정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장.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은 박주선 문제를 집중거론했다.
열린우리당 소속 양승조 의원은 “박주선 전의원의 경우 검찰권 남용과 무리한 수사 결과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극심한 피해는 누가 보상하는가. 몇 푼 안되는 형사보상금으로 구제가 되겠는가. 박 전의원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보았는데 담당검사에게는 어떤 조치가 있었나”라고 검찰을 질타했다.
검찰 출신으로 한나라당 소속인 주성영 의원은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가 된 사람이 있다. 언론보도를 보면 ‘1%의 정치검사가 문제다’라고 했다. 이분은 검찰에서 명성을 날렸고, 청와대에서 주요 요직도 지냈고 국회의원도 했다. 법원 판단이 잘못되었는가 검찰수사가 잘못 되었는가. 이 사건은 검찰 내부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는 검찰 과잉수사와 관련 박주선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감사장에서 한나라당 소속의 김성조 의원은 “정부 차원의 과거사 정리가 한창인데 박주선 의원이 겪은 억울한 피해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법무부나 검찰이 과거사 정리를 하는 차원에서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욕의 검찰사는 역사 속에서 권력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 󰠙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 대통령이 수사대상, 나라종금 사건 
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와 관련 노무현의 최측근인 안희정은 불구속 기소됐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후 나라종금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안희정이 돈을 받은 게 불거져 나왔다.
안희정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나라종금이 안희정에게 돈을 건넨 시점은 1999년 6월이었다. 나라종금이 퇴출된 건 2000년 5월. 1년 가량 앞선 시점이다. 경영 압박을 받고 있었던 나라종금으로서는 위기 탈출을 위해 모종의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로비 의혹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처벌이 가벼운 ‘정치자금법’ 위반죄가 적용됐다. 
안희정이 받은 돈은 노무현이 소장으로 있던 자치경영연구원 운영자금으로 사용됐다. 자금의 수혜자가 노무현이었다. 1999년은 노무현이 98년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화려하게 복귀,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던 때였다. 여당이었던 국민회의 부총재, 동남지역발전특위 위원장 등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국회의원이 돈을 받았다고 당 총재까지 조사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처럼, 돈이 들어간 자치경영연구원까지 무한정 수사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피해갔다.
안희정은 두 차례나 구속영장이 기각돼 결국 불구속 기소됐다. 당시 검찰 주변에선 ‘검찰의 의지 부족’을 영장 기각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제대로 수사를 하려면 사용처까지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똑같이 나라종금 사건과 관련된 박주선에 대한 검찰의 수사 태도는 180도 달랐다. 나라종금 사장이었던 안상태가 박주선의 동생에게 돈을 준 것은 2000년 초였다. 박주선이 옷로비 사건으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다.
안상태는 박주선의 고향선배였다. 옷로비 사건으로 구속된 박주선에게 “백년에 한명 나올까말까한 인재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울분을 토로하며 “반드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명예를 회복 하라. 전재산을 처분해서라도 선거비용을 대겠다”고 말해왔다. 또한 그 돈은 나라종금의 공금이 아닌 안상태 개인의 재산이었다. 총선에서 사용하라고 준 돈이었고, 총선에서 사용됐다.

한 사람은 ‘정치자금법’, 한 사람은 ‘뇌물’
박주선에게 준 돈을 문제 삼는다면 당연히 정치자금법 위반이 돼야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는 3년이다. 2003년 5월은 공소시효를 넘어선 때였다. 잡아넣고는 싶은데 적용해야 할 법이 없었다. 그래서 검찰은 공소시효가 긴 뇌물죄를 적용했다. 죄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법을 적용한 꼴이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박주선은 법무연수원 기획위원으로 있었다. 사실상 검찰에선 죽은 목숨이 된 예우 차원의 자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퇴출 저지를 위한 로비용으로 자금을 건넸다는 대가성을 들이대긴 옹색했다.
대가성이 있다고 뇌물로 기소하기 위해 검찰이 동원한 근거는 과거였다. 98년 4~5월께 “나라종금의 영업정지가 풀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안상태의 부탁을 받고 금감위 쪽 고위 인사를 소개해 주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도와준 댓가를 지불한다? 법의 논리가 아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한때 검찰은 “대가성이 없다고 보기엔 너무 큰 돈”이라는 이유까지 동원했다.
돈을 건넸던 당시의 지위와 정황, 이런 것을 종합해보면 청탁과 뇌물의 성격이 더 큰 쪽은 안희정 - 노무현 쪽이다. 그들이 돈을 받은 시점은 ‘퇴출이냐 생존이냐’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검찰은 안희정이 받은 돈은 정치자금, 박주선에 대해선 뇌물로 초점을 맞췄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안희정의 경우 돈의 수령·전달자는 안희정이고, 수혜자는 노무현이다. 박주선의 경우 돈의 수령자는 동생이고, 수혜자는 박주선이다. 그런데 전자는 수령자인 안희정을 처벌했고 수혜자인 노무현은 피해갔다. 박주선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한 쪽은 수령자, 다른 쪽은 수혜자를 처벌했다.
법의 형평성이란 게 있다. 이는 공정한 법 집행의 잣대가 된다. 더구나 이는 곧바로 국민들의 눈에 보이는 원칙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무리수를 뒀다. 두고두고 부끄러운 사건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왜 검찰은 삼척동자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무리수를 뒀을까.
박주선에 대해선 대가성 등을 채 입증하지 못한 단계에서 검찰의 사법처리 방침이 굳혀졌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두 번째 소환을 앞두고 “박 의원에 대한 처리방침을 지난 주말 결정했다”며 “받은 돈의 액수가 크고 명목과 돈 받은 경위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수사팀이 납득하지 못하는 데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겠나”라며 “재판결과도 중요하지만 검찰이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의 뜻은 뭘까. 국민여론을 앞세워, 설사 재판에서 무죄를 받을 지라도 사법처리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검찰은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상실한 사법처리를 강행했다. 판단을 흐리게 할 연막조차 없었다. 누가 봐도 정치인 박주선을 잡기 위한 억지와 무리였다.
담당검사까지 “이 사건은 기소해도 무죄가 선고될 것이므로 검사 양심상 기소를 못한다. 상부에 이야기 좀 하라, 왜 기소를 하라고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후 사건은 이 검사의 말대로 됐다.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고,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죄가 안될지 뻔히 알면서 사법처리 절차를 밟아간 것이다.
나라종금 사건이 터졌을 때 박주선은 당당했다. 그래서 두 차례의 검찰 소환에도 선선이 응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주선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국회에 체포동의안을 냈다. 짜여진 각본이었다. 죄가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때부터 박주선에겐 ‘비리 정치인’이라는 오명의 덫이 씌워졌다.
검찰의 소환 통보를 받은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응하지 않는다. ‘회기 중 불체포특권’을 이용, 시간을 끌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박주선은 그렇지 않았다. 검찰의 소환요구가 있지마자, 아니 본인이 재촉하여 검찰 조사를 요구했다. 나라종금 사건 때도 그랬고, 현대사건 때도 그랬다.
다음은 박주선이 2003년 6월 나라종금과 관련, 검찰의 구속영장청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성명이다. 다소 길지만 나라종금 사건의 진상과 검찰 수사의 배경, 그리고 당시 박주선의 심경을 생생히 담고 있어 그대로 인용한다.

정치자금의 수령자는 저의 동생이지만 제가 당시 그 사실을 몰랐다하더라도 결국 제가 그 수혜자입니다. 경위가 어떻든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앞으로 깨끗한 정치풍토 확립에 분골쇄신함으로써 저의 뉘우침의 소임을 다할 각오입니다.
안상태는 호형호제하는 동향선배이고 평소 저에 대해 많은 기대와 호의를 갖고있던 사람입니다. 제가 1999년 말~2000년 1월 중순까지 옷로비 의혹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당시 구치소로 수차례 면회를 와서 저의 억울한 구속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저에게 명예회복 차원에서 2000년 4월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하였습니다. 저에게뿐 아니라 저의 가족, 동생 등에게도 강한 권유를 하였습니다.
저의 처지에 대해 인간적인 동정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무소속 후보로서 후원회가 없는 제가 선거비용 조달에 애로가 있다는 생각에서 저의 동생에게 위와 같은 선거자금을 지원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안상태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아무런 청탁이나 대가 없이 제가 재기하여 명예를 회복하라는 뜻에서 순수한 정치자금으로 저의 동생에게 지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법의 테두리 내에서 엄정하고 공정하게 검찰권을 행사하여야할 검찰이 제공자나 수령자 모두가 어떠한 청탁도 없었고, 대가성도 없는 순수한 정치자금이라고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의 동생이 수수한 자금은 나라종금과 무관한 안상태 개인자금으로 밝혀졌고, 안상태는 제가 대통령 비서관직을 사직함으로써 공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의 대가성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저는 당시 보석으로 석방된 피고인 신분으로서 아무런 영향력을 향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음이 객관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미 정해진 정치적 표적수사의 시나리오에 따라 예단과 독단으로 제공된 돈에 대한 대가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실정법상 책임이 없는 수혜자에 불과함에도 조작된 국민정서를 빌미로 ‘무죄를 각오하고 기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초법적 논리를 내세워 저에 대해 특가법 위반(뇌물죄)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할 검찰이 스스로 검찰이기를 포기하고 법치주의를 말살하는 광기서린 포퓰리즘적 처사요, 특정지역인맥으로 구성된 현정부 사정라인의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정치보복을 위한 검찰의 살인행위라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검찰은 저를 소환 통보해놓고 조사를 하기도 전, 사전영장청구 계획을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심지어 특정인의 경우에는 정치자금의 수령자와 수혜자에 대한 법적 평가와 처리를 달리했던 전례와도 어긋납니다. 저에 대한 검찰의 조치는 정치적 보복과 편파수사의 음모와 흉계가 있음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언제까지고 풀을 쓰러뜨려 놓지는 못합니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습니다. 엄동설한을 이겨낸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진실에 위안하면서 정치검찰의 보복적 표적수사로 인해 결코, 두 번의 두우륙(杜郵戮. 충신이 죄없이 죽음을 당함)을 당하지는 않겠습니다.

 󰠙 법을 준수해도 죄가 된다  - 모든 정치인을 사법처리해야 할 ‘현대 사건’
17대 국회 들어서 정치인의 후원회 집회는 사라졌다. 정치자금법을 개정, 집회를 통한 정치자금 모금을 금지한 때문이다. 법인의 후원금도 사라졌다.
후원회가 허용됐던 16대 국회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한 집회가 1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국정감사를 앞두고서는 러시를 이뤘다. 장소를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정도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후원회가 절정을 이루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때는 피감기관들의 의원 질의 취소나 수위 낮추기를 위한 로비가 전방위적으로 이뤄지는 때다. 피감기관들로선 연고기업과 기관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고, 후원금의 액수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관련 상임위 감사에서 증인채택을 막기 위해 또는 발언수위를 낮추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생각해보라. 총수가 국회에 불려나가서 국회의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장면을.
국정감사 전 후원금이란 이렇게 대가성이 분명하다. 증인 채택을 막기 위해, 감사에서 빠지기 위해, 발언 수위를 낮추기 위한 대가성 자금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정치인이 조사 받거나 사법처리를 받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정치인에 대한 후원금. 대가성이 없는 돈은 없을 것이다. 후원을 할 때는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를 합법화시킨 게 정치자금법이다. 정치자금법이 정한 절차와 규정에 따라 돈을 받았다면 이는 정치자금으로 본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정치인들이 정치자금을 내는 후원인들을 조사해야 한다. 무슨 의도로 후원금을 내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고, 대가성이 없다는 확약서라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정치자금법의 규정을 지켜 정치자금을 받은 경우 처벌 받은 경우는 없었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다른 의원들과 똑같이 정치자금법에 규정된 대로 후원금을 받았는데 ‘뇌물’ 혐의로 구속 기소된 예외적인 사례가 있었다. 현대건설과 관련 구속 기소된 박주선이었다.
검찰의 혐의 발표를 본 박주선은 곧바로 후원금 처리 여부를 확인했다. 영수증이 발급됐고, 선관위에도 정상적인 후원금으로 처리됐음을 확인했다. 속된 말로 꿀릴 것이 없었다. 언론에 보도된 바로 그날 박주선은 검찰에 전화를 걸어 출두의사를 밝히고, 곧바로 검찰에 출두해 사실을 밝혔다.

정상적 정치후원금, 뇌물로 둔갑
이후 검찰의 수사는 치졸하기까지 했다. ‘박주선 죽이기’라는 목적을 위해 자의적 법적용과 궤변의 연속이었다.
검찰의 형편은 다급했다. 나라종금 사건으로 박주선을 옭아맬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빗나간 때문이었다.
나라종금 사건은 돈을 건넨 당시의 정황, 노무현-안희정과의 형평성 문제와 함께‘파쇼검찰’로 몰아붙인 박주선의 주장에 대한 공감이 늘어갔다. 검찰이 궁지에 몰린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성과 후퇴는 없었다.
언론의 첫 보도부터 그같은 의도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박주선, 현대로부터 거액 뇌물’(<한겨레> 2003. 9.16일자)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이 보도는 언론과 검찰간 공생관계의 한 단면이다. 검찰에서 내사 중이거나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언론에서 특종보도를 했을 때 기자들은 ‘어떤 의도에서 검찰이 흘렸나’를 주목한다. 독자적인 추적보도도 있지만 대부분 검찰에서 흘리면서 언론에 보도된다.
검찰이 외압에 의해 수사가 어렵거나, 수사 방향을 자신의 의도대로 가져가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다. 박주선에 대한 보도는 외압에 의한 수사의 어려움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검찰과 권력 간 갈등은 없었다. 그보다는 박주선을 옭아매기 위해 수사 방향을 정해놓고 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자금법상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다면 이는 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검찰은 이를 뇌물로 몰아가고자 했다.
뇌물이라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돈을 건넨 현대건설 임건우의 모순된 진술 외에 로비대상으로 선정하게 된 동기, 그날의 정황 등이 모두 거짓말로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은 임건우의 진술만을 토대로 박주선을 옭아맸다.
검찰 수뇌부와 담당 수사검사 간 이견이 있었다. “후원금 처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파악해서 수사를 했다. 죄가 안된다. 기소하지 않을 것이다”는 수사검사의 고백이 그때 나왔다. 그러나 수뇌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돈을 건넸다는 임건우의 모호한 행태을 봐야할 것 같다. 임건우는 박광태 광주시장의 뇌물사건에도 등장한다. 임건우는 2000년 국회의원이었던 박광태에게 청탁과 함께 3천만 원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국회 의원회관 출입기록을 확인한 결과 임건우가 돈을 건넸다는 날, 출입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박광태에 대한 수사도 대검 중수부에서 이뤄졌다. 처음 박광태는 불구속 기소됐다. 기소 전 중수부장 안대희는 전국특수부장회의에서 “공직자의 금품수수 행위에 대해 뇌물 수수액이 1천만 원 이상일 경우 구속수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박광태는 당연히 구속감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불구속 기소했다. 임건우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이때 알고 있었으리란 짐작이 가능하다.
박주선에게 뇌물죄를 적용하기 위한 근거는 단 하나였다. 임건우의 진술이었다. 임건우가 현대그룹 회장인 정몽헌의 국정감사 증인 채택을 막기 위해 돈을 건넸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박주선의 의정활동과 전혀 일치되지 않는 진술이었다.
임건우는 심지어 박주선과의 통화내용을 녹음해 이를 검찰에 제출하는 등 검찰의 하수인으로 행동했다. 그와 검찰 간 어떤 묵계가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최소한 뇌물을 줬으면 뇌물 공여로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 처벌을 피해갔다.
박주선을 잡기 위해 검찰은 총력을 다했다. 계좌를 뒤지고 주변 사람들을 모두 조사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왔다. 나라종금 사건도 무리수라는 점이 너무나 명백했다. 현대건설 사건에서 임건우라는 단 한 사람의 진술만 있으면 박주선을 잡아둘 수 있었다. 검찰은 그 쉬운 길을 선택했고, 임건우는 충실한 협력자였다. 
박주선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상고심에서 재판부는 “대가성을 입증할 수 없고 돈을 받은 뒤 곧바로 후원금으로 처리한 점에 비추어 뇌물로 볼 수 없다”, “ 박 전의원이 현대그룹의 현안과 관련해 노력을 기울인 흔적도 없다”고 밝혔다. 현대건설 사건은 이처럼 간단했다. 뇌물죄가 성립되기 위한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건을 억지 기소한 이유가 뭘까.
정치적 계산과 외압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당시 노무현 정권에 의해 새로이 구성된 검찰 수뇌부 인맥 구성을 보면 이 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 󰠙 노무현 정권의 검찰 장악
박주선의 두 번의 구속 두 번의 무죄를 주도한 검찰 수뇌부는 송광수(검찰총장. 경남 마산) - 안대희(대검 중수부장. 경남 함안) - 문효남(대검 수사기획관. 부산)이었다. 모두 노무현의 고향인 부산·경남(PK) 출신이었다.
출신지역을 따지는 게 또 다른 지역주의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검찰 내의 지역연고에 따른 인맥,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영남인맥 중심의 검찰재편은 ‘정권의 지역기반과 검찰’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노무현의 고향 PK 중심 세력교체
취임 직후인 3월 ‘평검사의 난’을 계기로 노무현정권은 검찰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송광수 - 안대희 - 문효남 체제가 들어섰다. 이 인사에 대해 노무현 정권은 ‘검찰개혁을 위한 인사’라고 내세웠다. 노무현은 이후 틈날 때마나 ‘검찰을 손에서 놨다, 권력기관을 손에서 놨다’며 권위주의 청산을 업적의 하나로 내세웠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노무현 정부 첫 검찰인사의 특징은 서열파괴와 PK 출신 중용, 그리고 대통령 사시동기들의 급부상이었다. 검찰 내에선 ‘검찰장악’이라는 반발이 나왔다. 노 대통령은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권한대행 등 여야 수뇌부 회담에서 다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던 도중 엉겁결에 “검찰은 이번에 꽉 쥐었는데……”라고 속내를  털어놓은 일까지 있었다. 대검의 한 간부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5공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고 언론에 불만을 토로했다. 
참여정부 첫인사에서 PK 출신 간부들은 모두 승진하거나 영전했다. 검사장 승진자 6명 중 3명의 출신지가 PK였다. 검찰총장과 고검장 승진자 등을 포함하면 6명으로 전체 승진자 13명 중 절반에 가까웠다.
게다가 PK 출신들은 줄줄이 검찰 요직을 차지하거나 동기보다 먼저 승진했다. 송광수를 비롯, 법무연수원장·대전고검장·인천지검장·대검중수부장 등이 노무현과 같은 고향 출신들이었다.
반면 호남 출신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10명의 좌천 인사 가운데 절반인 5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당시 대한변협 간부는 “서열파괴 등 과거의 관행을 극복하기는 했지만 정치권의 영향을 받는 인사시스템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같은 지역별 불균형 인사로 사표를 낸 검찰 간부 11명 가운데 5명이 호남출신이었다. 승진했거나 일부 요직으로 보이는 자리로 옮긴 호남 출신 간부들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내부 관측이 나왔다. 대부분 극심한 지역편중에 대한 비난을 우려해 일부 호남인사를 앉혔을 뿐, 실질적인 권한은 없을 것이란 분석이었다.
당시 대검의 한 고위간부는 “호남 출신들 가운데 영전한 간부들은 경기고 출신으로 호남출신이라는 사실이 ‘탈색’됐거나 성격이 온유한 사람들로, 위아래가 포위돼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남 출신 간부들의 비율은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43.24%로 전체 검사 비율을 6.46% 초과했다. 특히 노무현의 출신지역인 PK(부산경남) 출신 간부들은 노무현정권 들어 대거 약진, 전체 간부의 29.73%를 차지, 전체 검사 비율(18.88%)을 무려 10.85%나 상회했다.
이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보다 더 심한 지역편중 인사였다. 호남 출신 간부의 비율은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 전체 검사 비율에 비해 항상 낮았다. 전체 검사의 영호남 비율은 2대1이 채 안됐지만 검사장급에선 2대1을 넘어 3대1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검사장 승진 인사에서 소외됐던 호남 출신 간부들은 DJ정권 들어 약진, 1999년부터는 호남출신 간부 비율이 전체검사 비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 호남 출신 검찰간부의 비율(18.92%)이 낮아지기 시작해 노무현 정권 들어서면서 전체검사 비율(21.5%)보다 낮아졌다.
노무현은 호남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자신의 출신지역을 중용, 검찰을 재편했다. 
당시 문재인 정무수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검찰인사의 원칙과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인사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과거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 자율성을 해치거나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 그런 인사는 배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줄서기를 해서 (과거에) 인사상 특혜를 받았다든지, 검찰의 중립성에 상처를 입혔다든지, 과거 비리사건 때 제대로 수사를 못해서 특검까지 가게 만들었다는지……”(<신동아> 2003. 4월호)
노무현정부 첫 인사에서 호남출신들이 밀리는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전정권 임기 말 각종 비리게이트에 검찰 간부들이 직접 연루돼 옷을 벗거나 사법처리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들 사건에 대한 부실수사 비난 또한 적지 않았다. DJ정권 하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호남 출신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노무현 정부 첫 인사가 그 정도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사람이 적지않았다. 박주선의 2003년 3월 17일 법무부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의 공개적인 비판은 이렇게 나왔다. 박주선은 이 자리에서 “단지 출신지역만을 따져, 능력이나 자질을 고려하지 않는 인사 배제는 있을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반대로 영남인맥은 국민의 정부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중용됐다. 그러나 정치권과 검찰내 특정인맥의 결탁은 DJ정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누가 권력의 시녀였나
군사독재 시절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치권과 결탁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YS정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DJ정부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 중심에는 영남인맥이 있었다.
97년 봄 한보게이트와 소산게이트(YS 차남 김현철 수사)에 직면한 검찰은 머뭇거렸다. ‘몸통’을 뒷전에 둔 채 ‘깃털’수사에 불과하다는 비난과 지탄이 쏟아졌지만 검찰은 무기력했다. 오히려 의혹을 덮어버리려 했다.
언론에서 ‘위기의 검찰’을 얘기하며 권력의 안개에 가려진 거악의 실체와 일전을 벌여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결과 검찰은 국민의 총체적 불신에 직면했다. 위상은 바닥을 쳤다. 결국 한보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수사팀이 전격 교체되는 전례없는 치욕을 검찰은 감수해야 했다.
DJ 비자금 사건은 영남출신인 배재욱 YS정부 청와대 사정비서관이 발단이었다. 사정비서관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한나라당 정형근에게 넘겼고, 이를 강삼재가 폭로한 후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함으로써 정치쟁점으로 비화됐다. DJ의 집권을 막기 위한 검-정유착의 대표적인 행위였다.
YS정권에서 검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은 영남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권력과의 결탁, 그에 따른 검찰의 중립성 훼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YS정권에서의 죄가 DJ정권 5년을 거치며 자동세탁 됐다. DJ정권에서 물을 먹었다는 것이 ‘정치검찰’에서 ‘개혁검찰’로 변신하는 코미디가 연출된 것이다. 
단지 DJ정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유만으로 개혁적이고, 그래서 중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 결탁을 통해 기득권을 누려온 인사들을 청산하는 것이 검찰개혁이고, 검찰의 독립을 위한 길이다. 
노무현 정권은 반대의 길을 갔다. 특정지역 중심의 검찰 인사는 곧 특정 지역기반을 가진 정치세력과 특정인맥의 새로운 결탁과 협력관계 형성을 의미했다. 다른 의미의 정치권 입김에 의해 좌우되는 검찰의 탄생이었다.
노무현의 권력기관 세력교체는 검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국민의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가 2003년 3월 노무현을 만났다. 그는 당시 권력핵심부에서 흘러나오던 국정원 1급 인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현재 국정원의 1급 인사들은 대부분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을 지지했던 인물들입니다. 이들을 물갈이할 경우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국정원을 장악할 수도 있습니다. 물갈이 방침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알겠습니다. 검찰인사처럼은 하지 말란 말씀이죠?”라고 반응했다. 그 인사는 자신의 의견을 노무현이 수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뒤 고영구 원장 취임과 함께 국정원 1급인사들은 일괄사표를 제출한 뒤 전원퇴진, 위 인사의 우려처럼 물갈이가 단행됐다. 대선 때 누구를 찍었느냐는 노무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집권 직후부터 구시대에 대한 인적, 제도적 청산과 해체를 단행했다. 구세력의 물갈이를 통한 영남 중심의 새로운 집권세력 형성에 주력했다. 이 점에서 권력기관이었던 검찰과 국정원은 예외가 아니었다. 구세력은 곧 DJ세력을 의미했다.

노무현 - 한나라당 - 검찰의 이해관계 일치
노무현 정권 들어 등장한 ‘송광수 - 안대희 체제’는 대선자금 수사와 정치인 사정수사를 통해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팬클럽까지 생겼다. 그간 국민의 지탄을 받았던 검찰상을 생각하면 대전환이었다.
그렇지만 대선자금 수사와 정치인 사정이 검찰의 독립적인 의지만으로 가능했을까. 당시의 정치권 상황과 권력핵심부의 정치권 재편 의지는 이에 대한 답을 준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와 정치인 사정은 검찰 스스로의 생존본능이 중요한 추동력이었다. 검찰은 역대정권에서 ‘정권의 첨병’, ‘권력의 시녀’라는 비난 속에 정치검찰의 딱지를 떼지 못했다. 새로 들어선 검찰 인사 역시 노무현의 출신지역 중심으로 편성됐다. 정치적 의혹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검찰로선 정치권에 대한 가차없는 사정수사만이 살길이었다.
대선자금 수사를 놓고 한때 노무현과 검찰 간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노무현의 측근들이 사법처리되면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선자금 수사는 권력핵심부의 의중, 이해관계와 일치했다. 권력핵심부는 ‘정치권 인적 청산과 판갈이’를 원했고, 정치인 사정은 이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었다.
노무현은 앙시앙 레짐(구시대)에 대한 인적, 제도적 청산과 해체를 빠른 속도로 진행했다. 검찰인사의 기수 파괴, 국정원 물갈이, 김진표 경제부총리의 등장을 통한 관료사회의 세대교체, 고참 외교관들의 순차적 퇴진 등이 진행됐다. 정치권 물갈이는 완결판이었다.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은 노무현의 평생의 숙원이기도 했다.
노무현은 민주당 분당 - 열린우리당 창당을 통해 정치권 판갈이 시동을 걸었다. 그 종착지는 2004년 총선이었다. 총선 승리를 통해 판갈이를 완성하기 위해선 대대적인 물갈이 흐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통한 정치구도 변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노무현측의 미숙함과 기득권의 저항에 의해서였다. 이를 보완하고, 강제하는 수단이 검찰수사였다. 동교동계 출신, 민주당 잔류세력에 대한 도덕적 흠집내기와 정치적 무력화를 위한 수단으로 검찰수사는 유용했다.
정치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촉발했다. 검찰수사는 다시 정치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켜 세대교체를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정치인 사정의 최대 방해자인 야당의 형편도 비슷했다. 새로 들어선 최병렬 체제로선 대선자금 수사가 당을 장악하는 호기로 작용했다. 여야 핵심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유례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검찰수사는 한나라당 세력구도에 변화를 일으켰다. 한나라당을 제왕적으로 지배했던 이회창계는 된서리를 맞았고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회창계의 대표격이었던 서청원도 구속됐다. 영남 중심의 나머지 이회창계 인사들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내 비주류였다가 하루아침에 당 대표가 된 최병렬로서는 검찰수사가 자연스럽게 구주류를 솎아내주는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최병렬은 경남 산청 출신이다. 당시 서청원측은 “최병렬이 검찰 핵심부와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선자금과 관련 구속된 이회창계의 핵심 인사는 검찰 출두 직전 “우리 당 내에 검찰 핵심부와 핫라인이 있다. 위원장급인데 이름은 밝힐 수 없다. 검찰 내부의 수사 정보가 우리 당으로 전달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회창계 거세를 위해 검찰수사가 이용되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노무현정권 초 청와대와 검찰, 한나라당 최병렬계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이 때문에 정치인 사정과 대선자금 수사는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검찰과 정치권의 결탁이 이뤄진 셈이었다. 이는 곧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무리한 수사와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 󰠙 박주선과 안대희
두 번의 구속 두 번의 무죄. 두 주인공은 박주선과 안대희였다.
사법상 명암은 엇갈렸다. 안대희는 대검 중부부장으로 박주선 구속기소를 결정했다. 안대희의 승리였다. 그러나 박주선은 재판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 박주선의 승리였다.
사법정의상 박주선이 옳았고, 안대희는 틀렸다. 그러나 현실의 승패는 다르다. 안대희는 여전히 검찰 내 살아있는 권력이고 박주선은 재야에 외로이 남아있다.
박주선과 안대희는 사시 1년 선후배 사이다. 특수부 생활을 같이 시작했다. 1981년 저질연탄 비리 사건을 함께 수사했고, 정치적 외압에 의한 치욕을 함께 경험했다.
두 사람은 특수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1, 2년 차이로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맡는 등 검찰 내 잘나가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명암이 갈린 것은 DJ정권 들어서면서였다. DJ정권 역시 예외없이 권력기관에 대한 세력재편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안대희는 서울지검 특수1부장 보직 7개월 만에 대구지검 1차장으로 발령난 뒤 한직을 전전했다. 검사장 승진인사가 두 차례 있었지만 연거푸 물을 먹었다. 후배가 그를 추월해 검사장에 올랐다.
이때 안대희는 가슴에 사표를 담고 다녔다고 한다.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잘 나가던 처지에서 찬밥 신세가 됐으니 박탈감과 상실감은 몇 배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 역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영광을 누리다 몰락한 인사들이 주목한 이가 청와대 법무비서관이었던 박주선이었을 것이란 점은 쉽게 추측해볼 수있다. 16대 국회에서 정형근은 박주선과 언쟁이 붙었을 때 “국민의 정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게 누군데”라며 공격했다.
이는 당시 물을 먹었던 영남출신들의 인식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원망과 분노만 있을 뿐, 군사독재정권과 YS정권 때까지의 지역편중 인사에 의한 특혜, 그리고 정치권력과의 결탁이라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안대희에 대한 DJ정권 핵심부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여권 일각에선 ‘검찰 살생부’가 나돌았다. 여기에는 안대희도 포함돼있었다. 일각에선 그의 옷을 벗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안대희가 미운 털이 박힌 것은 DJ가 정계복귀를 위해 만들었던 아태재단과 관련이 있었다. 아태재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한 인사의 사업체 비리를 조사하면서 아태재단으로 자금이 흘러갔는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결국 안대희는 개인 간 거래인 임대계약이 적절하지 않다며 그 인사를 업무상 배임으로 기소했다. 이 사건은 재판부에서 무죄로 결론났다. 이같은 안대희의 수사가 DJ 측근들에겐 ‘DJ 죽이기’에 나선 정치검찰로 인식된 것이다.
‘옷을 벗을’ 위기에서 안대희의 생명을 구한 이가 박주선이었다. “옷을 벗기는 것은 옳지 않다. 나라와 검찰의 동량으로 일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 옷을 벗기자는 주장을 물리쳤다.
국민의 정부에서 안대희가 물을 먹었던 것은 꼭 정치적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안대희의 DJ정권 시절 좌절의 한 요인으로 수사 방식을 꼽는 의견도 있다. 
문제가 된 사례 중 하나가 설계감리회사 비리 수사였다. 서울지검 특수부장 시절이다. 안대희는 모든 회사를 조사하는 저인망식 수사를 펼쳤고, 이는 과잉수사 시비를 낳았다.
당시 정황에 대해 서울지검을 출입했던 한 일간지 기자는 “안대희 부장의 수사 스타일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며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대한민국 설계감리회사 리스트를 놓고 1위부터 100위까지의 회사 장부를 다 압수해 샅샅이 털었다. 업체들의 항변이 터져나왔고 이것이 김태정 총장 귀에 들어갔다. 김 총장이 안 부장을 불러 ‘민생을 생각해야지 수사만 하면 다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일부 기자들도 먼지털이식 수사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안 부장은 ‘표적수사로는 발본색원이 안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일로 김 총장의 눈 밖에 난 것이 DJ정부 때 한직으로 돌게 된 원인이었다.”(<신동아> 2003년 12월호)

안대희는 2005년 4월 8일 서울고검장 취임사에서 “인권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인권과 친절도 더없이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나 이를 핑계로 정의 실현을 폄훼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발언은 법무장관이던 김승규, 검찰총장 김종빈의 ‘인권존중수사’ 방침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안대희를 스타로 만들었던 정치인 사정과 관련, 박주선뿐 아니라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재판부에서 무죄로 결론났다. 무리한 수사와 기소가 있었음이 입증된 셈이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과 정반대의 결과였다. 
박주선과 안대희. 최고의 특수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지만 수사의 원칙과 방식은 180도 달랐다. 박주선의 수사 원칙은 ‘피의자 스스로 납득하는 수사, 누구든지 조사 결과에 승복하는 수사’였다.
그렇지만 ‘두 번의 구속 두 번의 무죄’의 수사 주체는 안대희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국회의원 박주선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남문로 774-1 3층 Tel: 062-227-8115~7 / Fax: 062-225-8115
국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국회의원회관 708호 Tel 02-784-5288, 2784 / Fax 02-788-0214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