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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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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간 박주선 - 가난과 고난이 그를 키웠다

작성일09-11-09 09:59 조회5,764회 댓글0건

본문

인간 박주선 - 가난과 고난이 그를 키웠다

 ‘삼시 세판’의 인연
광주고 수석 졸업 - 서울대 법대 - 사법고시 수석- 동기 중 선두를 놓치지 않았던 검찰에서의 승승장구. 박주선이 걸어온 길을 보면 소위 잘나가는 사람의 전형이다.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도 불운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삶의 한 단면이다. 잘나갔던 그의 인생의 이면에는 끊임없는 고난과 좌절, 그리고 이를 이겨온 의지와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세 번의 구속 세 번의 무죄’는 사람들의 가슴에 더 아프게 다가간다. 
가난했던 그의 성장과정은 눈물겹다. 그러나 가난만이 그에게 주어진 고난이 아니었다. 그의 평생을 걸친 고난과 시련, 그리고 극복을 가르키는 단어가 ‘3’이 아닐까한다.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인생의 중대고비인 대입과정에서의 3수, 그리고 인생의 절정기에서 맞은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가 그것이다.
박주선은 광주고를 수석졸업했다. 그해 그의 대학 입학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의 낙방을 겪었다. 인생의 중대 고비에서 ‘좌절’이라는 시련을 겪은 것이다.
첫 번째 시험에서 그는 ‘do’의 과거형인 ‘done‘을 헷갈려서 중요한 해석문제를 풀지 못했다. 중학생 수준이면 다 알 수 있는 단어의 뜻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를 붙들고 있다 시간에 쫓기고 말았다. 박주선은 시험이 끝나고 담임선생과 친구들에게 ‘done’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당시 선생과 친구들은 그가 농담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첫 번째 낙방을 했다.
두 번째 낙방은 수학시험에서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대괄호를 가우스 기호로 오해해 결국 문제를 풀지 못했다. 가우스 기호는 동경대 시험에 나왔던 문제였다. 같이 시험을 본 친구에게 가우스 문제를 풀었냐고 물었을 때 무슨 얘기냐는 말을 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주선의 어머니가 고3 때 점을 봤다고 한다. 이때 시험에서 떨어질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인생의 중대고비에서 예상하지 못한 좌절이었다. 가난 속에서 모든 것을 박주선에게 걸었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부담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 역시 그들의 희생이었다. 좌절할 여유마저 박주선에겐 없었다.
박주선은 3수 끝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 세 번의 시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사법고시에서는 수석합격의 영광을 차지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3’
박주선은 세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입학전이었다. 할아버지가 밤 늦게 박주선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박주선이 개울에 빠져버린 것이다. 박주선은 허우적거리며 빠른 물살에 떠내려갔다. 할아버지는 발만 동동 구를 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지나가던 동네 어른이었다. 구사일생이었다.
두 번째는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 자동차가 귀한 시절이었다. 박주선을 친 차는 경찰서장의 차였다. 병원으로 실려간 박주선은 1주일간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주변 의견은 회생이 불가능한 쪽으로 기울었다. 박주선의 외가에서 관과 수의를 만들어온 상황에서 박주선은 일주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기사회생이었다.
세 번째 죽음의 고비는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 과정에서였다. 현대건설 사건으로 감옥에 갖힌 그에게 1심이 끝난 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보석이 허가됐다. 17대 총선 옥중출마를 위해 여러차례 보석 석방을 간청했음에도 법원은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 법원이 2004년 7월 뜻밖에도 박주선을 석방했다. 본인조차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심장병을 발견한 것은 보석 후 건강검진을 하면서였다. 자각증상이나 징후는 전혀 없었다. 심장을 점검하자는 의사의 권유에 ‘필요없다’고 거부할 정도였다.
검진 결과는 1만 명에 한 명 나올까말까한 스트레스에 의한 심장발병이었다. 관상동맥 하나는 이미 석회상태가 돼있었다. 이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다.
수술을 받고 회복기간인 2개월이 지난 후 열린 2심 선고 공판에서 법정구속됨으로써 박주선은 세 번째 구속의 길을 가야 했다. 하늘은 그의 목숨을 구했지만, 아직 시련을 끝내지 않았다.
그리고 박주선은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라는 검찰사상 유례가 없는 일을 겪어야 했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그가 살아왔던 인생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고난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명예가 난도질 당했다.
검찰은 물론이고 언론,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그를 매도했다. 박주선은 옷로비 사건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이제 박주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검찰총장의 꿈을 키우며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이 부정당한 데 대한 절규였다. 그 시련을 세 번이나 더 겪어야 했다.
그의 ‘3과의 인연’은 모두 인간의 의지를 극한까지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내린 시련은 사람이 아닌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의 의지와 극기를 위한 계속된 시험이라는 것이다.
박주선이 세 번째 무죄를 선고 받고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DJ였다. DJ는 “처음부터 무죄를 확신했다”며 “나를 보라”고 얘기했다. 군사정권에 의한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무고한 옥살이를 했지만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던 그의 삶의 궤적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난은 인간을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인간으로의 성숙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고난을 이겨낸 승리에 사람들은 감명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한 인간의 고뇌와 불굴의 의지를 읽기 때문이다.
<맹자> 고자하(告子下) 편에서 맹자(孟子)는 큰일을 할 사람에겐 먼저 시련을 내린다는 점을 설파했다.

하늘이 장차 큰 소임을 사람에게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며, 그 힘줄과 뼈를 고달프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하여 행하는 일마다 의지와 엇갈리게 한다. 이로써 마음을 분발케하고 인내심을 강하게 하여 지금까지 그가 능히 하지 못했던 일을 잘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 󰠙‘강요된’ 가난과 ‘선택한’ 가난 - 가난은 박주선 성장의 자산 
박주선의 인생은 가난에서 출발, 가난의 지속이었다. 그의 성장과정은 가난과 그 가난을 공부를 통해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검찰생활은 또 다른 가난의 연속이었다. 명예를 위해 청렴과 철저한 자기관리의 길을 간 때문이었다. 돈이 없었고, 돈을 멀리한 두 개의 삶을 산 것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의 기억을 자신의 더 높은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자산으로 삼았다.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으로 사법고시 수석합격
박주선은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소년시절을 보냈던 집은 토담집이었다.
추운 겨울밤 기차역에서 동생을 부둥켜안고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궁핍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당시 박주선의 아버지가 변변한 일을 못하는 처지여서 어머니가 사실상 가장 노릇을 해야했다. 어머니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계란과 쌀을 사서 광주에 내다파는 일로 두 아들의 학비를 대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박주선의 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 것도 이런 환경에서 빚어진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 보성과 광주를 오가야 했던 박주선의 어머니는 기차삯을 아끼기 위해 무임승차를 하고 다녔다. 더러는 역무원들에게 들켜 유일한 생계수단인 계란과 쌀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무임승차하다 들켜 곤경에 처해있었다. 이때 열차 차장이 다가와서는 난감해하는 어머니를 풀어주고 차비도 건네주며 열심히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소년 박주선은 ‘나도 커서 힘있는 검사가 돼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가난한 수재 소년들의 전형적인 입지였다.
박주선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이었다. 어머니 한 사람의 힘으로는 생계와 박주선과 동생의 학비를 모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동생 박주현은 박주선이 고교 3학년일 때 중학교 졸업반이었다. 동생은 어머니와 박주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진학을 포기했다. “너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형과 “공부를 잘하는 형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동생이 심하게 언쟁을 했다. 그렇지만 이미 형을 위해 희생을 결심한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동생은 서울 재수생활부터 박주선을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아침마다 공장을 향했고, 박주선은 학원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박주선의 뒷바라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박주선이 광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해 자취하던 시절에는 주말이면 광주 자취방을 직접 찾아왔다. 고향에 박주선이 내려오는 시간을 아껴주기 위한 배려였다.
박주선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어머니까지 박주선의 뒤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와 동생은 박주선이 과외교습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까지 반대했다. 생활의 모든 짐을 두 사람이 질 테니 공부만 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낮이면 건물 청소원으로, 밤이면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들의 밥을 해주며 학비를 댔다. 동생 또한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새벽에는 신문배달까지 했다. 
이같은 가족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헌신에 박주선은 한눈 팔 겨를이 없었다. 그의 시험 준비는 대학 도서관과 세들어 사는 단칸방, 사과상자로 만든 작은 책상에서 이뤄졌다.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함으로써 가족들의 희생에 부응했다. 1974년 제16회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했다. 이를 당시 언론은 ‘홀어머니 모정 - 피 팔아 뒷바라지’, ‘ 가난한 집안에 용났다’고 보도했다.
‘피를 판’ 사연은 이렇다. 박주선은 보성남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할 처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피를 팔아 입학금을 마련했다.
여기까지가 박주선이 가난한 집안에서 가족들의 희생과 본인의 집념으로 검사가 되는 입지전적 과정이었다. 그 후의 그의 삶은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졌다. 이때까지의 가난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환경이었다.
앞날은 달랐다. 사법시험 합격으로 그는 선택할 수 있었다. 가난이 그의 성장을 위한 자산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삶에 왜곡의 그림자로 남을 것인가. 인간 박주선의 몫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의 길
‘어려움은 함께 해도 즐거움은 함께하기 어렵다.’ 역사와 인간사에서 숱하게 보아온 일이다. 창업 또는 성공을 위한 고난은 함께 해도, 그것을 성취한 후 그 열매의 단맛을 나누는 것은 별개였다.
흔히 가난한 집안 출신이 소위 출세했을 때 배신과 갈등이 시작된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소재중 하나다. 가난한 시절은 부끄러운 과거가 되고, 부에 대한 집착과 출세욕에 불타 가족 심지어 연인까지 차버리는 신파극이 그것이다.
그러나 박주선은 달라진 게 없었다. 수석합격이라는 우쭐해할 만한 일도 그를 변화시키진 못했다. 형편이 달라졌지만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여전히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다.
박주선의 부인 이현숙은 중학교 교사 출신이다. 대학 나닐 때 사귀던 사이였다. 평범하지만 예절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다.
박주선이 고시에 합격한 후 그에게도 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물론 잘나가는 집안, 돈 많은 집안 출신 여자들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박주선은 여기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우리 가정형편에 맞고, 부모님을 잘 모시고 이해해주는 여자여야 한다”는 게 그의 결혼관이었다.
그의 공직생활에서의 청렴한 생활을 보여주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제일 유명한 게 DJ의 선물을 되돌려 보낸 사건이다. 박주선은 공직 재임시절 일체의 촌지나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이를 실현하고 있었다. 명절 때면 으레 인사치레나 선물을 피하기 위해 집을 비우거나 경비실에서 되돌려 보내는 조치를 취해놓았다.
1999년 추석 무렵 대통령은 각료와 청와대 수석 및 비서관 등의 집으로 홍삼선물세트를 보냈다. 박주선의 선물은 예외없이 경비실에서 돌려보내진 것이다. 총무비서관은 “대통령 선물을 물리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DJ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DJ는 박주선이 옷로비  사건으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석방된 2000년 1월 중순, 비서를 통해 건강진단을 받으라고 위로금을 보내면서 “받는다 안받는다 하지 말고 얼마 안되는 돈이니 받으라”는 말을 했다.
검찰 재직 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부임했던 해남지청장 때 일이다. 하루는 광주고검 검사장이던 조성욱이 박주선을 불렀다. 조성욱은 박주선에게 자신의 월급봉투를 내밀었다. 의아해 하는 박주선에게 조성욱은 “내가 박 검사에게 격려금을 주고 싶은데 그냥 돈 봉투를 주면 박 검사 성격으로 봐서 다른 사람한테 받은 돈인 줄로 알고 안 받을 것이 뻔하니까 내 월급봉투째 준다”는 것이었다. 이미 박주선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품을 안 받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 소문이 광주고검 검사장이었던 조성욱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모양이다. 조성욱은 박주선을 향해 “우리 검찰에 이렇게 청렴한 검사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한번은 퇴직한 직원이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퇴직한 후에도 잊지 않고 돌봐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 돈을 받은 박주선은 “이 봉투 안의 돈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주선은 봉투 앞면에 ‘미의(微意)’라는 한자를 적고 뒷면에 자신의 이름을 쓴 다음 상대에게 돌려줬다. “내가 받았으니 당신도 받으시오.”
‘대전법조비리’ 파문 때 법조계의 관행적인 떡값이나 전별금이 문제가 됐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검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때 검찰내에선 ‘박주선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
전별금은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었다. 박주선은 이를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면 부하직원들이나 경비원, 그리고 청소원들에게 나눠줬다.
박주선의 이같은 청렴함은 그의 정치입문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경향 각지에서 그를 돕고자 사람들이 그의 고향인 보성과 화순에 몰려들었고, 자비를 들여 자발적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주선의 청렴은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기간 전국에서 박주선을 돕고자 많은 인사들이 화순·보성을 방문했다. 이들은 선거비용에 보태쓰라며 격려금 봉투를 내밀었다. 박주선은 “직접 찾아온 것만도 감사하고 미안한데 어떻게 돈까지 받느냐”며 거절했다. 일방의 선의가 꼭 선의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다. 그의 거절에 대해 일각에선 ‘박주선이 공직자 티를 못벗었다’ ‘깨끗한 척만 해가지고 당선이 되겠느냐’는 원성이 나올 정도였다. 
박주선은 국회의원 4년 동안 후원회를 2002년 3월 딱 한 번 열었다. 16대 국회 때는 국회의원들이 매년 후원회를 열어 정치자금을 거둘 때다. 박주선의 후원회에는 약 3천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박주선은 이날 들어온 후원금 중 화순·보성 지역구 주민들이 가져온 후원금 2억 2천여만 원을 전액 돌려주었다. 지역 인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초청장을 보내지 않는 등 주의를 기울였으나, 지역인사들이 정성을 모아 보낸 것이다. 이를 접한 박주선은 “지역민들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지역민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며 “마음만 접수하겠다”고 후원금 전액을 돌려보냈다.
박주선이 이처럼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왔던 것은 돈보다 더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사시절 검찰총장이라는 꿈이었다. 박주선은 초임검사 시절부터 ‘검창총장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를 자만의 계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찰총장감으로서 스스로를 절제하고 단련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몸가짐을 ‘검찰총장’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서울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를 최고의 ‘특수수사통’으로 키운 것은 검찰총장이 되겠다는 야망이었다.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승부근성도 생겼고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다.
 
나는 어느 조직에서 생활을 하든지, 항상 목표를 높이 잡고 열심히 생활한다. 큰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내가 그것을 위해 열심히 매진할 때 내 스스로가 일탈이나 남용을 자제하고 극기하게 되는 것을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는 정치에 입문해서도 늘 유효한 생각이었다.(<이땅의 새벽을 위해> 박주선. 2000)

옷로비 사건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나온 직후 자신을 가리켜 “죽어버렸다”고 표현한 말도 그래서 나왔다. 초임검사 시절부터 몸가짐에 각별히 신경을 썼고, 강직을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아왔다. 그런데 그는 명예를 잃었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찍혔다. 온갖 불명예스런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검찰총장이라는 꿈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담금질 해온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나라종금·현대건설 사건으로 그는 부정 또는 비리 정치인으로 내몰렸다. 청렴을 생명처럼 지켜온 그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 󰠙 인간의 얼굴을 한 검사
74년 사법시험에 수석합격, 검사가 된 박주선은 승승장구했다. 인사때마다 그에게는 항상 ‘동기 중 선두’라는 말이 붙어다녔다. 
박주선은 최고의 ‘특수수사통’이었다. 그가 한번 수사하면 ‘죄가 밝혀지지 않고는 (피의자가) 밖에 못 나간다’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까지 보면 그는 인정사정 없는 냉혹한 검사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검사였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의 수사에 담겨있었다. 그래서 적이 많다는 특수수사통이면서도 마당발로 통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죄가 밝혀지지 않고는 못 나간다’
1979년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아 1년 3개월간의 공판부와 형사부를 거친 박주선에게 특수부 발령이 떨어졌다. 검찰 내에선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검찰의 꽃’인 특수부의 경우 발탁으로 충원하는 게 관례였다. 그만큼 지원자가 많았다. 특히 서울지검 특수부의 경우 초임검사 발령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박주선의 특수부 발령을 놓고 특수부와 형사부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다. 형사부에선 ‘못 내놓겠다’는 것이었고 특수부는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야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를 조정한 사람이 나중에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석휘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다. ‘검찰총장감’이라며 박주선의 분발을 촉구한 이도 김석휘였다.
특수부로 간 박주선은 검사로서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당시 검찰내 호남출신은 인사상 불이익을 적지 않게 받았다. 인정을 받고 크기 위해선 몸가짐을 바로 가져야만 할 뿐 아니라 실력을 겸비해야 했다.
1981년 특수부 발령을 받은 후 맡은 가장 큰 사건은 ‘저질연탄 비리 사건’이었다. 박주선은 동력자원부 석탄국장을 수뢰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그때만 해도 서슬 푸른 군사독재시절이었다. 신출내기 박주선이 석탄합리화정책의 주무국장을 구속시켜 버렸으니 권력층의 얽히고 설킨 커넥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이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다. 청와대, 안기부, 업계의 조직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검찰 수뇌부에 박주선의 사표를 받아내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박주선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 이미 박주선은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한다는 생각이었다. 박주선은 사건을 밀어붙여 1심, 2심, 3심에서 전부 유죄를 끌어냈다. 중간에 무죄선고라도 나왔다면 그것으로 박주선의 검사 생활은 끝났을 것이다.
초임검사가 소신과 원칙을 고수한 대가치고는 검찰조직이 입은 타격은 컸다. 저질연탄사건은 단일사건으로 검찰조직 전체가 흔들린 80년대의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돼있다. 검사장은 좌천성 승진, 박주선의 직속상사였던 특수 1부장은 서울고검, 3차장은 부산지검2차장으로 쫓겨났다.
이후 박주선은 특수수사통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아간다. 그가 다룬 사건 중에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대형 사건들이 많다. 그는 이 사건들을 매끄럽게 매듭지어 그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철희 장영자 사건(82년) △H그룹 회장 외화밀반출 사건(94년) △대전EXPO위원회 비리 사건(94년) △D그룹 부도 사건(95년) △보건사회부 장관 부인이 연루된 안경사협회 로비 사건(96년) △국민회의 부총재를 구속시킨 서울시교육감 선거비리 사건(96년) △97년 대선의 최대 쟁점이었던 DJ 비자금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검찰 내에서는 ‘박주선이 한번 수사하면 죄가 밝혀지지 않고는 (피의자가) 밖에 못나간다’는 검사로서 가장 영광스런 이미지를 굳혔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검사’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동기들 중에서 줄곧 선두를 달렸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출발해 대검 검찰연구관, 대검 초대 환경과장, 대검중수부 3과장, 2과장, 1과장, 서울지검 특수2부장, 특수1부장, 춘천지검 차장, 대검중수부 수사기획관 등 검사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요직을 거쳤다. 검찰총장을 향한 길을 차근차근 밟아간 것이다. 
그의 일에 대한 원칙과 집념이 드러나는 사례가 옷로비 사건 당시 김태정의 부인 연정희에 대한 조사였다. 옷로비 사건은 그의 명예가 실추된 사건이다. 내막은 철저한 수사였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박주선과 김태정은 특수관계라 할 정도로 가까웠다. 검찰 내에 많지 않았던 광주고 9년 선후배 사이였다. 문민정권 사정 바람이 한창일 때인 93년, 김태정이 대검 중수부장으로 있을 때 박주선은 과장으로 호흡을 맞췄다. 97년 김태정이 검찰총장이 됐을 때 춘천지검으로 발령난 지 6개월 밖에 안된 박주선을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불러들였다. DJ정부가 출범하면서 검찰에 남아있겠다는 박주선을 설득해서 청와대로 들여보낸 것도 김태정이었다.
그렇지만 연정희에 대한 조사는 한치도 봐주는 것이 없었다. 박주선에 대한 옷로비 사건 재판 당시 언론인들이 공증한 진술서가 재판부에 제출됐다. 옷로비 사건이 쟁점화되기 전 기자들과 김태정 간 대화록을 기자들이 스스로 공증해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다.
이 대화록에 따르면 1월 18일 김태정은 밤늦게까지 부인이 귀가하지 않자 연유를 알아봤고, 이때 비로소 사직동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김태정은 ‘내 부하였던 박주선이가 일언반구 얘기도 없이 밤늦게까지 사직동팀에서 부인을 조사하다니, 이런 괘씸한 놈’이라고 박주선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는 내용이다.
이때 김태정은 박주선에게도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내가 그래도 일국의 검찰총장이야. 일국의 검찰총장 부인을 멋대로 조사해. 당장 보내.” 격노한 목소리였다. 박주선이 지휘하는 사직동팀이 설마 그렇게까지 부인을 조사할 줄은 몰랐던 김태정의 분노였다. 
그 시각 그의 부인 연정희는 12시간째 사직동팀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강도 높은 조사였다. 연씨가 귀가한 것은 밤 1시가 넘어서였다. 이날 강인덕 당시 통일원장관 부인 배정숙씨는 조사를 받다 각혈을 하고 쓰러졌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배씨를 병원으로 옮기고 조사를 중단했다.
박주선의 입장은 단호했다. ‘명명백백하게 밝히지 않으면 큰일 난다.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명백하게 밝혀주는 게 총장에게도 도리’라고 생각했다.
박주선이 김태정에게 넘긴 보고서도 ‘부인 관리를 잘하라’는 의미로 넘겨준 것이었다. 박주선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박주선은 옷로비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이 인정된다’고 당시의 철저한 수사를 받아들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여기까지만 보면 박주선은 영낙없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검사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한 검사였다.
박주선은 검사 생활의 4분의 3을 특수부에서 보냈다. 특수수사통의 경우 오래하다 보면 적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박주선은 예외로 꼽힌다.
박주선을 잘 아는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여러 면모가 섞여있다. 박주선의 언론 프로필에는 마당발이라는 말이 꼭 들어간다. 피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고, 사람사귀기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공사구분은 분명했다. 대표적인 게 앞에서 말한 김태정의 부인에 대한 수사였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단아함을 잃지 않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면서도 공사 구분이 분명했고, 피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지만 사건 처리에서는 냉정한 편이었다. 목표를 세워놓고 돌진했지만, 주변과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았다.
하늘은 한 인간에게 모든 재능을 함께 내리지 않는다. 재주가 뛰어나면 덕이 없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경원받는 게 다반사다. 대표적인 이가 참여정부 총리인 이해찬이다. 이해찬을 평가하며 누구나 ‘재주가 좋다, 능력이 있다’는 평이지만 ‘인간성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가 박주선이었다. 그는 ‘재’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잘나갔던 경력이 입증하는 바다.
동시에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배려라는 덕을 갖추고 있었다. 마당발이라는 별칭은 그의 의도적 사람 사귀기가 아닌 자연스런 인간성의 발로가 낳은 결과였다.   
수사에 임하는 박주선의 원칙은 ‘피의자 스스로 납득하는 수사, 누구든지 조사 결과에 승복하는 수사’였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피의자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합리적 수사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 이같은 원칙으로 수사를 했을 경우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가 없다.
검사 시절 한번은 국민회의 부총재를 조사했다. 평생을 야당정치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죄를 인정할 경우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박주선은 따뜻한 말 한마디로 혐의사실을 스스로 털어놓게 했다. 죄는 죄였다. 그리고 재기할 수 있다고 위로했다. 박주선의 위로대로 그는 17대 총선에서 재기했다.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그였지만 ‘대전EXPO 조직위원회 비리사건’ 수배자를 ‘형평에 어긋난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불구속 기소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이 사건은 박주선이 중수2과장이었던 시절로 12명이 구속된 대형사건이었다. 박주선은 당시 수배자였던 모 부처 5급 공무원인 김모씨의 부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아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인데,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지막 병간호를 위해 구속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후 그 남편은 자수 했다. 자신이 구속될 경우 아내를 간호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검찰 소환에 불응하고 도피생활을 하며 틈틈이 집으로 가 부인을 간호해오던 처지였다.
문제는 구속된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였다. 박주선은 과감히 불구속 결정을 내렸다.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형평성을 문제 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박주선은 끝까지 저간의 사정을 밝히지 않았다. 이 사실이 공개될 경우 그 가족들이 받게될 상처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끝내 그 부인은 사망했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남편의 품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검사님께 나를 대신해 인사를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박주선은 해남지청장 재직 시절 청소년 선도위원들과 함께 동백장학회를 만들었다. 가정환경 때문에 사고를 치고 들어오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장학회였다. 가난한 환경에서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 위에서 공부해온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만든 장학회였다. 지금은 기금이 10억 원을 넘어섰고, 그동안 수혜를 입은 학생만도 1000여 명에 달한다. 
박주선이 2000년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을 때 전국각지에서, 박주선을 돕기 위해 그의 고향에 몰려들었다.
이미 끈이 떨어진 그였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외면하는 것이 세태다. 그러나 박주선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끈 떨어진 그의 재기를 바라며, 보답 없는 투자를 기꺼이 했다. 주요 선거운동 현장에 몰려든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상대후보 진영에선 경악했다. ‘이런 선거운동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공직생활에서의 몸가짐, 그리고 인간적 면모가 만들어낸 새로운 풍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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