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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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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과 박주선의 만남

작성일09-10-21 17:53 조회5,130회 댓글0건

본문

I. 김대중과 박주선의 만남

DJ와 박주선.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가져다 준 만남이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국가위기 극복과 변화·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선택이자 명령이었다. 길었던 시간만큼 험난한 앞날이 ‘DJ정권’ 앞에 놓여있었다. 영광도 있겠지만 고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길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50년간 한 세력의 집권은 강력한 기득권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지 않았다. IMF위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DJ 정권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선 그 기득권 세력과 질서를 깨야했다. 박주선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 사이의 충돌은 피할수 없었다.

 󰠙역사의 격랑에 몸을 싣다

국민의 정부 ‘법무비서관’

박주선을 위한 자리였다. DJ 집권 후 만들어졌고, 박주선이 떠난 뒤 두 달여의 공백기간을 거쳐 직제 개편으로 없어졌다.
박주선이 물러난 뒤 법무비서관 직책이 없어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권한이 너무 집중됐다는 게 첫 번째다. 다음은 적임자가 없어서이다. 같은 직급의 공직자 중 법무비서관에게 주어진 업무를 처리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사정·공직기강·법률 자문이 소관 업무였다. 공직기강에는 인사추천과 검증이 포함된다. 참여정부 청와대로 치면 민정수석, 인사수석 등의 업무를 한데 모아둔 자리였다.
또한 직제상 법무비서관은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자리였다.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가 ‘파워’를 결정하는 게 권력세계다. 언제라도 얼굴을 맞댈 수 있다는 것은 곧 ‘정권의 실세’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 정권의 기반은 취약했다. 50년의 집권 동안 우리 사회의 주류로 각계각층에 포진한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은 여전했다. 그들이 DJ정부를 바라보는 눈은 냉소적이었고, 심지어 적대적이었다. 야당이나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공직사회도 ‘5년만 버티자’,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는 무사안일과 복지부동, 냉소주의가 팽배했다.
이래선 안정적 국정운영과 개혁 추진은 불가능했다. 50년간의 적폐를 털어내고, 기강을 바로잡는 게 새 정권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 중심에 법무비서관이 있었다.
DJ는 집권 초 정권의 성패를 가름한 막중한 자리에 박주선을 기용했다. 그전까지 두 사람 간 개인적 인연은 전혀 없었다. 박주선은 DJ의 측근 정치세력이었던 동교동계와도 교류가 없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박주선이 로비하거나 청탁한 바도 없었다. 오히려 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DJ의 박주선 발탁은 검찰에서의 능력과 평판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박주선은 한눈팔지 않고 검사의 길을 걸어왔다. 영남정권과 그 인맥이 지배하는 검찰에서 호남 출신이 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였다. ‘각별한 몸가짐’과 ‘능력’이다.
변호사 출신으로 DJ정권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은 “법무비서관이 보통 자리가 아니어서 수석비서관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법조계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박주선을 추천하더라”고 발탁배경을 얘기한 바 있다.
그렇다고 김중권이 박주선을 밀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DJ로선 인연만을 따진다면 박주선을 믿을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선 검찰총장을 맡고 있었던 김태정의 추천이라고 보도했지만 이것도 결정적인 힘은 아니었다.
김태정은 내심 박주선의 청와대행을 원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 후 불어닥칠 외풍으로부터 검찰을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박주선의 거부의사가 워낙 강해 김태정으로서도 권할 처지가 못됐다. 김태정은 4명의 후보 중 마지막 자리에 박주선의 이름을 넣었다.
박주선은 영원한 검찰이기를 원했다. 그는 검찰에 몸을 담으면서부터 ‘검찰총장감’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그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박주선은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지 않기 위해서 기자들에게 “내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첫 만남에서 의기투합
발표 하루 전날(2003. 2. 9) 비서실장 내정자였던 김중권이 전화로 의사를 타진해왔다. 박주선은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김중권은 알았다며 이력서나 하나 보내달라고 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박주선이 법무비서관 내정 사실을 안 것은 다음날 공보수석 내정자였던 박지원의 발표가 난 후 기자들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청와대 측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린 것이다. 소식을 접한 박주선은 곧장 김태정에게 쫓아갔다. 안 가기로 했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따졌다. 김태정 역시 정확한 경위는 몰랐다.
검찰총장에게 항의했지만, 공직자로서 인사권자의 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박주선의 청와대행에서 김태정의 역할이라면 내켜하지 않는 그의 등을 떠민 것뿐이다. 박주선에게 “누군가는 가야한다. 검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해달라. 외풍을 막아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검찰에선 미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정권교체라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기에다 DJ가 누구인가. 대표적인 검찰에 의한 피해자다. 검찰의 기소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바뀌어 만나게 됐고, 이제 한 배를 타야했다.
박주선의 청와대행에 대해 당시 검찰에선 반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은 시대적 과제였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면서 검찰을 통제했던 사정수석실을 없앤 것도 이에 대한 응답이었다.
박주선의 검찰에 대한 애정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소신 역시 확고했다. 새로운 위상과 관계설정 과정에서 검찰의 의견을 대변해줄 것이란 기대와 믿음이 컸다.
이같은 검찰의 바람을 알고 있었지만 박주선은 이때까지만 해도 내심 DJ에 대한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피해자로서, 민주화운동을 해온 인사로서 강경하고 무리한 요구를 밀어붙이지 않을까하는 우려였다. YS의 저돌적, 즉흥적 일처리를 여러 차례 봐왔던 터였다.
법무비서관은 법률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통치권자의 성품에 따른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그것이 부조화를 이룰 경우 부작용과 마찰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우려는 첫 만남에서 해소됐다. DJ와 박주선의 첫 만남에서 ‘검찰 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의견은 일치했다.
“검찰이 바로 섰더라면 대통령께서 기소되지도, 사형선고를 받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대통령을 모시면서 저는 대통령님과 같은 제2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검찰을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첫 만남에서 박주선의 건의였다, DJ는 전적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민주투사의 과격함이나 검찰에 대한 편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주선의 검찰 개혁에 대한 소신과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소신껏 일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DJ의 검찰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였다. 검찰독립에 대한 DJ와 박주선 간 의견 일치가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집권 후반기 지역편중 인사, 각종 게이트 연루 등으로 DJ의 검찰독립에 대한 소신은 많이 훼손됐다. 그렇지만 박주선이 청와대에 있었던 집권 초기, 검찰에 대한 DJ의 인식과 태도는 한결 같았다. 정치적 독립이라는 원칙을 지켜간 것이다.
국정운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법률적 절차와 과정을 중시했고, 정치인 출신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초법적 발상의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박주선은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들어선 DJ정권의 청와대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시대적,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도전의 길이었다. 그러나 소수정권이었다. 격랑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격랑에 박주선은 몸을 실었다.


 󰠙‘DJ 비자금 수사 유보’ 결정의 주역

‘박주선 - 김태정 - 김영삼’

DJ와 박주선 간 인연을 따지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선의 중대고비에서 대통령 후보와 검사로서 ‘사건’으로 만났다.
DJ와 이회창 간 대선 열기가 점차 뜨거워지고 있던 1997년 10월 20일. 검찰은 DJ 비자금에 대한 수사 착수를 선언했다.
국민들은 경악했다. 진실과 관계없이 수사 자체만으로 선거결과에 직접 영향을 미칠 대형폭탄이었다. 대선 판도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한나라당 이회창이 기운을 차리며 DJ와의 양자대결구도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이 조성되는 듯했다.
다음날인 21일. 검찰총장 김태정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각후보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과 국민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그의 입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수사유보였다. 극적인 반전이었다. 희비가 엇갈렸다.
이 극적인 반전 뒤에는 박주선이 있었다. 박주선이 DJ정부 청와대행을 망설인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었다. ‘DJ 비자금 수사 유보 결정’의 한 주체였다는 점이었다.

이회창의 마지막 승부수
97년 대선 마지막 쟁점은 ‘DJ 비자금’ 수사 여부였다. IMF를 초래한 집권당 후보, 거기에다 아들 병역비리로 도덕성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후보가 이회창이었다. 기사회생의 길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지역주의 바람은 거셌다. 판세는 지역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미세한 승부로 가고 있었다.
이회창 측은 10월 초 ‘DJ 비자금’을 폭로하며 막판 뒤집기를 시도했다. 이회창 측은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검찰을 끌어들였다. 검찰에 고발장을 냈고, 검찰수사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시간상 대선까지 수사를 끝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회창 측 역시 원하는 바는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DJ가 비자금 수사를 받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정치인에게 검찰 소환과 조사는 치명타다. 사실 여부는 뒷전이다. 포토라인에 서는 순간 ‘비리정치인’으로 낙인찍힌다. DJ가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보여질 때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수사 착수 여부에 대해 검찰총장이었던 김태정은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수사 여부 타당성을 검토했던 이가 대검 수사기획관이었던 박주선이었다.
박주선은 수사를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경우를 상정하고, 그 문제점과 파급력을 면밀하게 검토했다. 결론은 ‘대선이 끝난 뒤 수사해도 문제가 없다’였다.
‘이회창 측의 고발은 정략적이다. 여기에 응해 수사를 한다면 검찰이 정략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으로 봤다. 검찰이 수사에 나설 경우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특히 호남 민심의 악화는 민란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호남민심은 두 번의 대선 패배를 선선히 수용했다. 정상적 선거를 통한 패배였기 때문이었다. 검찰 수사가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경우가 달랐다. 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불공정 경쟁이다. 저항은 불을 보듯 뻔했다. 소환된다면 선거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는 곧바로 국가적 비상사태를 의미한다. 박주선은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법률적인 해석도 덧붙였다. 당시만 해도 <정치자금법>이 정비돼 있지 않았다. 대가성이 있을 경우 뇌물로만 처벌이 가능했을 뿐 정치자금에 대해선 처벌이 불가능했다. DJ 비자금을 뇌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박주선의 판단이었다.
박주선의 ‘수사 유보’ 건의에 김태정은 여전히 난감해했다.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2단계로 법조계 원로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을 거쳤다. 김태정은 고검장 회의를 열어 논의했다. 박주선은 전현직 검찰 간부들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의견은 거의 일치했다. “누가 집권하든 정치적 중립을 포기했다는 멍에를 쓸 것”이라며 수사 유보에 손을 들어줬다.
박주선은 다시 김태정의 결단을 촉구했다. 검찰독립을 위한 역사적 결단임을 강조했다. ‘선거결과가 어찌되든 이 결단을 내린 데 대해 국민들이 평가해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마침내 김태정은 수사 유보로 마음을 굳혔다.

지옥과 천당을 오간 이틀
김영삼 전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DJ 비자금 사건 수사 유보를 결정한 것으로 기록했다.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주선이 수사 유보를 김태정에게 건의했고, 김태정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동의를 얻어냈다. 검찰총장은 수사 유보를 발표했는데, 대통령으로부터 수사하라는 지시가 나오는 엇박자를 막기 위한 사전조율이었다. YS의 태도는 적극적 결정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동의’에 가까웠다.
YS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수사 유보 결정 이후 YS가 겪었던 수모가 입증한다. 검찰의 발표 이틀 뒤 이회창은 기자회견을 통해 YS 탈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원집회에선 YS인형이 등장했고, 그는 조롱거리가 됐다.
이같은 ‘YS 죽이기’에 대해 YS를 옹호하는 세력은 없었다. 정치적 동지였던 민주계마저 침묵했다.
DJ 비자금 수사 여부는 드라마틱한 상황으로 전개됐다. 김태정이 수사 유보 기자회견을 한 것은 10월 21일. 전날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겠다는 선언을 했다. 언제까지 미뤄둘 수만은 없었다.
검찰은 주임검사를 배정하고 ‘수사 착수’ 선언을 하는 등 본격 수사체제에 들어갔다. 사건을 맡게 된 대검 중수부장 박순용은 기자 간담회에서 “검찰은 수사에 따른 파장과 부작용 때문에 고심을 거듭했으나 고발장이 정식으로 접수된만큼 통상의 사건처리 절차를 따르기로 했다”며 “일단 수사에 착수한 이상 법의 정신과 원칙에 따라 서두르거나 늦춤이 없이, 정정당당하게 수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오후에는 기자들에게 “(정치권이) 우리를 수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앞으로 수사에 따른 부작용이나 파장은 검찰 책임이 아니다”는 비장한 수사의지까지 밝혔다.
본격적인 수사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태정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었다. 기자회견 전까지 누구도,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했다. 김태정과 박주선, YS만이 알고 있었다.
기자회견장의 김태정은 굳은 표정이었다. 김태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극심한 국론 분열, 경제 회생의 어려움과 국가전체의 대혼란이 분명하다고 보여진다”며 “수사기술상 대선 전에 수사를 완결하기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수사 유보를 선언했다.
국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조선일보와 MBC가 한국갤럽과 공동으로 국민여론을 조사한 결과 DJ비자금 검찰 수사 유보에 대해 ‘잘한 일’이라는 의견(49.9%)이 ‘잘못된 일’ 이라는 의견(33.6%)보다 훨씬 높았다.
이회창의 강수는 역풍을 불렀다. YS 탈당요구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65.8%)는 의견이 ‘공감한다’(30.2%)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무책임한 폭로와 검찰을 이용한 판세 역전을 노렸던 이회창 측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대선이 끝난 뒤 검찰수사에 의해 DJ 비자금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청와대에서 갖고 있던 DJ 관련 자료를 사정비서관이던 배재욱이 국회의원인 정형근에게 넘겼고, 이것이 이회창에게 전달된 것이다.
또 한나라당이 DJ 비자금이라고 폭로한 1천억여 원 중 DJ 개인 비자금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중 일부가 당시 DJ가 속해있던 국민회의나 그 전신인 민주당 또는 평민당의 공식계좌로 입금돼 당 공식기구의 결의를 거쳐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 󰠙‘DJ정권 핵심’으로 부상
 - DJ의 신뢰와 동교동계의 견제

박주선이 청와대에 근무하던 어느 날.
DJ는 박주선을 관저로 불렀다. 박주선은 늘 있던 있이었기에 소관 업무를 챙겨 대통령에게 갔다.
이날 대통령은 업무 때문에 부른 게 아니었다. DJ는 이날 “박 수석처럼 영명하고 사리가 합리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다”며 “이대로만 보좌해 달라. 은혜를 안 잊겠다”고 말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DJ였다. 이날은 달랐다. ‘은혜’라는 표현까지 쓰며 신뢰와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박주선에 대한 DJ의 신임과 애정은 각별했다. 그에 대한 호칭은 ‘박 수석’이었다.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았다.
DJ의 박주선에 대한 신뢰도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수석비서관 부부동반 모임에서 DJ는 돌아가면서 비서관들에게 덕담을 했다. 박주선에게 DJ는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고 평했다. 공보수석이던 박지원이 기자들에게 “최고의 극찬을 받은 사람이 박주선”이라고 소개해 널리 알려졌다.
박주선은 대통령의 수영장까지 불려간 최초의 비서관이었다. 보고하겠다고 부속실에 얘기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일과 중에는 물론이고 일과 후에도 불렀다. DJ가 박주선에게 듣고 싶어한 것은 소관 업무에 국한되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국정 전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DJ와 YS의 화해
YS의 차남 김현철에 대한 사면복권도 DJ의 의지와 박주선의 합리적 일처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YS는 청와대를 떠나면서 아들에 대한 사면을 부탁했다. DJ는 박주선에게 “나도 자식을 둔 사람이다. YS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나. 대통령 재직 중 자식이 구속된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줬으면 한다. 자식(김현철)도 반성을 했을 것”이라고 김현철의 사면복권을 부탁했다.
국민여론이 부정적일 것이라는 점을 DJ는 알고 있었다. 박주선에게 “여론이 부정적이더라도 대승적인 화합 차원에서 사면을 해주는 게 어떻겠나. 미국 남북전쟁 후 링컨은 전범처리를 하면서 화해조치를 취했다. 국민여론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링컨은 화해를 주장, 사면했다. 링컨이 여론에 따라 처벌했으면 연방 형성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역사가 평가하고 있다. 현재 여론은 반대하지만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뜻을 따라줬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말했다.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 이상의 뜻이 담긴 김현철 사면복권 요청이었다.
김현철 사면설이 나오자 예상대로 국민여론은 들끓었다. 참모들은 흔들렸고, 점차 ‘사면불가’ 쪽으로 기울었다. 관련 기관에서도 안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은 ‘여론이 반대한다. 국민정서가 악화될 것’이라며 사면불가를 주장했다.
박주선이 ‘그럴 수 없다’고 나섰다. 이미 김현철은 47억 원의 추징금을 납부했다. 또 사면을 예상, 대법원 상고를 취하한 상태였다. 박주선은 “사면을 기대하고 한 행동으로 사면이 되지 않을 경우 재판 받을 권리의 박탈이다. 사면 약속을 번복하면 대통령의 신뢰가 실추될 수밖에 없고, 이는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라며, 국민정서를 고려한 대안으로 ‘선사면 후복권’을 제시했다.
김현철의 사면복권은 박주선의 주장대로 이뤄졌다. 대통령의 약속과 국민정서를 고려한 일처리였다.
박주선에 대한 DJ의 믿음은 박주선이 옷로비 사건으로 낙마한 뒤에도 이어졌다. DJ는 박주선이 보석으로 풀려난 다음날(2000. 1. 15) 전화를 했다. “구속된 후 울화 때문에 잠이 잘 안 온다. 회의도 취소한 적이 있다. 나도 사형선고를 받아 보았기 때문에 그 억울함을 잘 안다”고 위로했다.
다른 자리에서는 “내가 부르지 않았으면 검찰총장이 됐을 텐데”라고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DJ는 늘 ‘자기를 보라’고 말했다. 억울하게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마침내 대통령이 됐듯 시련을 딛고 일어서라는 격려였다.
박주선이 옷로비 사건으로 사의를 표명했을 때 DJ는 만류했다. 박주선이 사퇴 의사를 굳힌 이유는 옷로비 관련 혐의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이상 국정에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DJ는 단호했다.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는 데 여론 때문에 그래서는(사퇴) 안된다”고 만류했다. 박주선의 거듭되는 사퇴 표명에 DJ는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박주선이 사퇴한 후 약 두 달여간 법무비서관은 공석이 됐다. 박주선을 잃은 DJ의 상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DJ는 나라종금 사건, 현대건설 사건으로 박주선이 사법처리 대상이 됐을 때도 “무죄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고 변함없는 신뢰를 나타냈다.

DJ의 국정운영에 필요한 인물군
박주선은 앞에서 말했듯 DJ와 개인적 인연은 없었다.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주군 - 가신’의 구시대적 관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정운영에서의 ‘파트너십’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국정에 대한 DJ의 합리적 시각과 접근, 여기에 박주선의 일처리 능력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DJ는 대통령이 되면서 국정운영의 주체가 될 새로운 인물군을 찾았다. DJ에게는 군사독재의 탄압을 이겨내며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온 동교동계라는 가신 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DJ는 이들에게 국정을 맡기지 않았다. 충성스런 가신과 국정운영 능력을 가진 인재를 구분한 셈이다. DJ가 처음부터 가신들을 전진배치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더라면 박주선같은 외인부대는 설 땅이 없었을 것이다.
DJ의 정치활동에서 인재풀을 넓혀가는 과정을 보면 그의 합리적 인사스타일을 볼 수 있다. 87년 정치에 복귀한 DJ는 동교동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재야 민주화운동출신 그룹과 전문가출신 그룹을 당의 주요 인물군으로 발탁했다.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성과 도덕성, 국민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조화시킨 인물군 수혈이었다. 현재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서 요직에 있는 인사들이 대부분 이때 DJ가 발탁한 사람들이다. 이해찬,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가 그들이다.
대통령이 되면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인물교체를 요구했다. 기존의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에게 국정을 맡겨둘 순 없었다. 그러나 DJ는 소수파였다. 철저한 비주류였다. 준비된 인물군이 있을 리 없었다. 국정 경험이 전무한 동교동계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정치 쪽이야 동교동계에 맡겨둘 수 있지만, 국정에 대한 책임은 처음 맞는 상황이었다.
집권자로서 DJ에게는 국정운영 능력과 함께 DJ의 철학과 노선을 이해하는, 즉 ‘코드와 능력’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군이 필요했다. 박주선은 DJ가 대통령이 된 후 ‘새로운 인물군’의 필요에 의해 발탁됐고, 그중 DJ의 신뢰를 받게 된 대표주자 격이었다.
DJ는 군사독재의 탄압, 야당 총재와 대선 출마 등으로 인해 ‘투사적’이고, ‘권력지향적’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합리주의자였고 원칙주의자였다. 또한 국정운영 과정에서 그의 지식과 경륜을 활용할 줄 알았다. 때론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규정과 절차에 따른 논리적, 합리적 의견을 제시하면 군말 없이 수용했다. 박주선이 DJ의 신뢰를 받게 된 첫 번째 이유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박주선의 소신과 직언이었다. DJ의 카리스마에 맞서 반론을 제기하거나 자기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장관이나 비서진은 없었다. 그러나 박주선은 달랐다. 눈치 살피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DJ가 박주선을 신뢰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박주선과 동교동계의 차이
DJ는 박주선의 소신과 직언을 높이 샀지만, 권력의 한 축이었던 동교동계는 그렇지 않았다. 집권 초기 비서실장 김중권, 정무수석 이강래, 박주선이 ‘신주류 3인방’으로 불리웠다. 세 사람이 세력이나 네트워킹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각자 소관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DJ의 신임을 얻었다. 이들이 두각을 나타내자 국정운영에서 소외된 동교동계의 질시와 견제가 시작됐다.
집권 초 동교동계 실세들의 국정에 대한 입김은 차단됐다. 국정이 청와대와 새로운 참모들 중심으로 흘러가면서다. 당연 그들은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위해 풍찬노숙했던 그들이다. 이제 권력의 단맛을 보길 원했다.
특히 인사를 맡고 있었던 박주선은 동교동계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박주선은 단호했다. 경력과 전문성 기준의 인사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동교동계에서 추천한 공기업 사장이나 감사 후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격 기준에서 미달할 경우 가차 없었다.
1998년 3월 초 박주선은 DJ의 차남 김홍업으로부터 인사 추천 전화를 받았다. 박주선은 “대통령 아들이 인사에 의견을 내면 안된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홍업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박주선은 “나는 당신 아버지를 모시러 왔지, 당신한테 한눈 팔려고 온 사람이 아니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주선은 심지어 DJ가 직접 챙긴 사람도 기준에 미달할 경우 배제했다. DJ와 가까웠던 H씨는 산하단체장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스크린 과정에서 부적절하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박주선은 이를 보고했고 DJ는 수용했다.
박주선의 일처리에 DJ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깊이 신뢰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동교동계는 달랐다. 자신들의 의사가 무시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당 인사가 “우리가 감옥에 있을 때 너는 뭐 했냐. 네가 뭔데 고생한 동지들을 물 먹이느냐. 그러면 오래 못 갈 것이다”는 협박전화까지 했다.
그가 옷로비 사건으로 고초를 겪을 때 여당에선 박주선을 옹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다.
동교동계와 박주선의 DJ를 보는 시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박주선은 국정을 중심에 놓았지만, 동교동계는 권력이었다.
양자의 차이는 이후 권력 운용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민의 정부 초기, 인사 편중이나 무원칙, 전횡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그러나 동교동계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사정은 180도 바뀌었다. 인사 편중과 동교동계의 인사개입, 전횡에 대한 비난과 소문,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이는 온갖 비리게이트의 근원지가 됐고, 임기 말 비리정권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됐다.
DJ가 ‘은혜’라는 표현까지 쓰며 박주선을 신뢰하고, 역사를 함께 쓰자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 󰠙 부정과 비리에 칼을 대다
 - 검찰 독립, 사정과 공직기강 확립의 주역

국민의 정부는 공직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사정으로 부정과 비리를 단죄했다. 그러자 정치권은 예외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1998년 6월부터 시작된 ‘사정 바람’은 점차 정치권으로 향했다.
정치권 사정이 한나라당 총재대행이었던 이기택 등 거물급과, 국세청을 동원한 불법 대선자금 모금 이른바 ‘세풍사건’으로 번지자 정치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선 곧바로 불만과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야당에선 자신들의 목을 죄어오자 ‘야당 파괴 공작’, ‘이회창 죽이기’로 규정했다. 국회 파행, 장외집회 등의 극한투쟁으로 맞서 정국을 대치국면으로 몰아갔다.
여당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정치인 사정은 여당인 국민회의가 배제된 채 진행됐다. 정무 쪽과의 통로가 차단됐고, 여당과의 정보교류나 조율은 없었다. 사전에 정보를 알아내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던 여당으로선 당혹스러운 일이다.
정치권 사정의 강도가 강해지자 주역이 누구냐가 관심의 초점이 됐다. 정치권에선 처음엔 박주선과 민정비서관이었던 이범관을 주목했으나 결론은 박주선으로 모아졌다. 정치권과 악연의 출발점이었다.
청와대와 검찰 간 라인이 박주선이었다는 점은 맞다. 그러나 이미 박주선은 검찰수사에 대한 개입과 간섭의 고리를 끊고 있었다.
1998년 8월 31일 이회창이 총재로 복귀하는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날 박주선은 검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세풍에 연루된 서상목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했다는 것으로 ‘정치적 파장이 있을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적 파장이 예상된 사건임에도 이미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뒤, 그것도 한나라당 전당대회 날 청와대에 통보한 것이다.
세풍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주선이 세풍사건 보고를 받은 것은 수사가 시작돼 이미 20여일이 지난 후였다. 국세청 간부 두세 명이 이미 구속된 상황이었다. 사전기획이나 표적 사정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DJ정권의 정치권 사정은 신중했다. DJ의 정치개혁에 대한 소신은 강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인위적 인적 청산보다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게 기본입장이었다.
당시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은 정치인 사정에 대한 DJ정권의 입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즘 야당에서 정치적 의도가 있는 수사라느니, 표적수사 보복수사라느니 말이 많지만 국민의 정부가 그런 의도성 수사를 하려 했다면 지금 야당이 그대로 존속할 수 있겠느냐. 30여 년 이상 여당만 해온 그들의 비리를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한다면 과연 안 걸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그러나 이런 식의 사정은 진정한 화합과 정치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게 김 대통령의 기본시각이기 때문에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에 대한 정치권 외압 차단
참여정부는 업적 중 하나로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는 DJ정부 때부터 시작된 흐름이었다.
그 이전 사정수석 등이 사실상 수사에 개입했고, 자신의 입맛에 따라 결과를 조율했다. 자연 검찰은 청와대와 정치권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검찰에 대한 정치적 외압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낀 이가 바로 박주선이었다. 초임검사 시절 박주선은 서울지검에서 ‘저질연탄 비리사건’ 수사를 맡았다. 채탄장려금 명목으로 석탄업자들에게 국가가 무상보조금을 지급하던 때였다. 동자부 석탄국장을 비리 혐의로 구속시켰다.
석탄업자들이 일제히 구명로비에 나섰다. 그때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대통령 전두환의 처삼촌인 이규광이었다. 부탁을 받은 이규광은 전두환에게 ‘검찰의 매명의식 때문에 깨끗한 공직자가 구속됐다’고 석탄국장의 선처를 요청했다.
검찰에 엄청난 회오리가 일어났다. 수사 지휘 책임을 물어 검찰총장이 교체되고, 검찰간부 여러 명이 좌천됐다. 권력 실세의 악의적인 검찰 비난과 대통령의 즉흥성이 만들어낸 정치적 보복이었다.
박주선은 법무비서관 재임 중 검찰로부터 수사 중간보고를 받는 관행을 없앴다. 수사 관련 보고를 받게되면 이런저런 의견 교환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청와대의 뜻’으로 둔갑돼 전달될 소지가 있었다. 박주선은 이같은 잘못된 관행을 끊고자 아예 수사 방향 또는 내사지침이나 수사 중간보고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검찰 수사와 관련된 보고를 받는 것은 수사가 모두 끝난 뒤였다. 대통령 보고가 이미 언론에 발표된 뒤 이뤄진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수사 진행상황을 묻는 DJ의 질문에 박주선은 “모른다”고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DJ는 박주선의 소신을 믿어주었고 그의 검찰독립의지에 힘을 실어줬다.
정치권 사정에 대해 DJ는 “사정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여야 차별없이 법에 따라” 하라고 지시했다. 세풍사건 처리에 대해 DJ는 “용서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라며 “구여권의 조직적 범죄는 일반정치권 사정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정치적 고려를 배제한 강력한 사정을 주문했다.
박주선은 이를 받아 “대통령이 검찰의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는만큼 지금이야말로 검찰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는 호기”라며 “사정은 조용하지만 지속적으로 해야하고 검찰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검찰의 독립과 자율성을 강조했다. 정치적 입김을 차단함으로써 검찰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사정과 검찰수사에 대한 입장에서 DJ와 박주선은 일치했다. 심지어 청와대 수석회의에서는 ‘관련 수석 외에는 검찰 수사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말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라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언론에는 검찰에 대한 간섭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박주선의 건의를 수용해 내린 지시였다.

소리 없이 강하다
검찰수사와 별개로 공직사회와 사회지도층에 대한 강도 높은 사정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됐다. 국세청, 금융감독위원회, 감사원, 공정거래위원회 등 준 사정기관이 총동원됐다. YS정부의 검찰 위주 사정과는 크게 달랐다. 공직사회 사정은 박주선이 주도했다.
당시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과거정권에서와 같은 표적사정, 정치적 목적의 사정에 대한 우려가 그 하나였다. 다음은 경제인을 대상으로 할 경우 경제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였다.
DJ정부는 이런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강도 높은 사정작업을 추진했다. 사정은 DJ정부가 출범한지 4개월여가 지난 1998년 6월부터 본격화 됐다.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야 개혁에 탄력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주선은 국가기강확립대책실무협의회를 주재하고 감사원, 국세청 등 관계기관을 총동원하는 사정에 돌입했다. 총대를 멘 박주선은 “정치적 복선은 없다. 그리고 성역도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수사 및 내사활동은 통상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구태여 사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 죄가 있는 곳에 법적인 처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사정은 박주선의 말대로 진행됐다. YS정부는 임기 내내 사정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요란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DJ정부에서는 박주선의 말대로 사정이라는 말을 꺼릴 정도로 조용하게 진행됐다.
그해 9월 비리공직자 1만여 명을 적발했고 700여 명을 파면 또는 구속했다. 박주선은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는 일과성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강도 높은 감찰활동을 계속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제계에 대한 사정은 조심스럽게 진행됐다. IMF 위기상황에서 경제살리기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초래한 기업인이나 부도덕한 재벌들에 대해선 단죄의 칼을 빼들었다. 기아 회장 김선홍, 청구 회장 장수홍이 구속됐고 삼미그룹 전회장인 김현철을 지명수배했다.
사정은 원성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정권교체기에서 공직기강 확립은 정권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첫 과제였다.
그 주체는 깨끗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또한 역풍을 막기 위해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일이었다.
옷로비 사건은 이 과정에서 잉태됐다. 신동아그룹의 외화 밀반출 사건에 대해 박주선은 엄정한 법처리를 원칙으로 했다. 신동아의 구명로비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다.
재벌은 보복에 나섰다. 그리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야당, 보수언론이 들고 일어섰다.
과연 그들의 힘은 막강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고 거짓이 진실로 바뀌었다. 그들은 피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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